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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선생 Sep 13. 2018

젊음이라는 세금

장영수, 「동해 1」

1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라는 말이 격언이던 시절이 있었다. 고생할 수 있는 영광이 누구에게나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일까? 이 말은 돈을 주고서라도 고생이라는 값진 경험을 해야 한다는 어른들의 '참된 가르침'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고생을 한다는 것은 인간의 욕망과 거리가 멀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 역시 그저 편안하게 놀고먹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기 때문이다. 다만 그렇게 할 수 없을 뿐이다. 일을 하지 않으면 당장 굶어 죽을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청년들의 사회진출이 너무나 어려운 요즘 시절에 저런 말은 반쯤은 맞고 반쯤은 틀린 말이다. 청년들은 고생을 하고 싶다. 직장을 얻어서 땀 흘려 일하고 싶다. 일을 하면서 보람도 얻고 싶다. 여기까지는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그러나 '돈을 주고서'라도 고생을 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취업을 위해서 지금까지 들인 비용도 엄청난데, 또 돈을 주고 고생을 해야 한다는 말은 납득이 되지 않는다. 


솔직히 이 말은 고생을 '사치품'처럼 생각할 때에야 받아들일 수 있다. 고생할 필요가 전혀 없는 '금수저'가 체험 삼아 하는 고생 말이다. 혹은 이미 고생할 필요가 없는 입장의 사람들이, 살기 힘들다며 불평불만하는 젊은이들에게, 그 시절의 고통에 당위성을 부여(강요)하는 말처럼 들릴 뿐이다. 


2

〈겨울에, 내 사촌과 바닷가에서. 찬 모래 위에서. 검은 바위들을 들이받는 물결 소리 속에서.〉

벌겋게 소주에 취한 내 사촌은
졸업을 하고 공장을 차리겠다고
설쳤다. 가진 돈도. 배경도
없으면서. 파도가 물거품을 튀기면서.

우리의 차가운 옷섶이. 겨울 바다의
체온을 닮으면서. 우리가 겨울
동해 바다 연변의 풍경의
한 조각이 되면서.

먼 해안의 부두에. 공장 굴뚝
연기가. 얼어 붙은 듯. 하늘로 뻗어
오르는 것을 보았다. 열차의 경적
소리가. 우리 등 뒤에서. 시뻘건 겨울
저녁놀에 깨져 나가는 것을 들으면서.

우리는 돌아왔다. 컴컴한 어둠
속을 설치던 내 사촌은 군대에 가서
죽고. 나는 동해 바다의 끓어
오르던 물결 소리를 깊숙이 내
안으로 구겨 처박고 잠 재우고 있다.

잠들지 않는 젊은 우리들의 망상을
거칠도록 단호하게 빠져나오면서도
또 어느 거리 어느 길목에서 세상의
모든 담벼락에 검은 바위들에 일일이
참혹하게 부딪히면서.


아직 중국의 경제적 부상이 이루어지기 전, 우리나라 사람들의 유토피아는 동해를 출발하여 태평양을 건너 미국으로 가는 것이었다.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면서 유학이나 이민을 결심하던 사람들이 많았고, 지금도 물론 그러한 기류가 적잖이 존재하고 있다. 만약 자신이 직접 가지 못한다면 자식이라도 갈 수 있도록, 혹은 국가가 지향하는 산업(무역) 정책에 일조할 수 있도록 노력했을 것이다. 


인용한 시는 1970년대 후반의 작품이다. 박정희 정권의 주도로 이루어진 경제성장이 절정에 달했을 시절에, 그 시절 젊은이들은 누구나 공장에서 일하고 싶었을 것이다. 고향을 떠난 젊은이들은 공장 종업원이 되고, 나아가 공장장이라는 꿈을 꾸었을지도 모른다. 태평양을 향하는 입구로서 동해를 바라보며, 거친 파도가 이는 깊고 푸른 동해 바다를 바라보며, 술에 취한 젊은 혈기는 국가산업의 한 축을 담당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그것은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 가진 것 아무것도 없이 대기업을 일구었다는 성공신화는 그야말로 국가 자체도 빈털터리였을 때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국가가 어느 정도 기반을 갖추고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나타나면서, 이제 신화는 불가능해졌다. 성공을 향해 나아갔지만, 결국 이루지 못한 채 처참히 좌절했다는 슬픈 전설만 전해질뿐이다.


3

국가는 젊은이들에게 '젊음'이라는 세금을 원천징수한다. 젊음은 국방을 담당(감당)하고, 출산을 담당(감당)하고, 은퇴한 기성세대를 담당(감당) 해야 한다. 자신의 가족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젊음이라는 세금으로 유지한 것은 국가와 국가수장들(그들의 수혜자들도)의 삶이었던 때가 많았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그저 뜨거운 혈기로 동해 바다를 바라보며 꿈을 키우던 청년은 군대에서 죽었다. 그 죽음에 분노할 수 없었던 또 다른 청년은 이 험한 세상 여기저기 부딪히며 살아갔다. 어쩌면 그는 하루하루 술에 취해 비틀거렸는지도 모른다.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꿈(망상)을 억누르면서, 그럼에도 이루고 싶은 꿈(망상)을 간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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