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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선생 Sep 20. 2018

돌아가시고 나서야 깨닫는다

고정희, 「수의를 입히며」

1

철없는 자식은 부모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의 지난날을 반성한다. 그리고 깨닫는다. 부모는 진정으로 강했던 것이 아니라, 강한 척했던 것을 말이다.


요즘 시대는 자수성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자수성가의 가능성은 거의 없다. 사회는 시간 싸움이라, 먼저 진출한 기득권을 비집고 들어가기 쉽지가 않다. 새로운 변화의 물결이 다가온다고 하더라도, 이미 자본을 확보한 기득권자들이 그 변화를 자신의 것으로 '소유'할 수 있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기득권이 만들어 놓은 새로운 청사진을 따라 열심히 노력한다. 그러나 그것조차 이미 낡아버리고, 또 새로운 청사진이 제시된다.


이렇게 사회에 진출하여 넉넉하고 행복한 삶을 꿈꾸는 것이 힘들어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젊은 사람들이 부모에게 조금 더 오랫동안 기대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을 두고 기성세대의 욕심이 부른 현상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자립심을 갖추지 못한 철없는 젊은이들의 모습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어떠한 사회적 의미를 지니든지 간데, 부모에게 자식은 언제나 모자란 존재이고, 그래서 부모의 마음은 눈 감는 그 순간까지 편할 수가 없다. 게다가 남겨줄 것조차 없이 가난하다면 그러한 자신을 먼저 책망하기 마련이다.


2

논두렁 밭두렁에 비지땀을 쏟으시고
씨앗 여물 때마다 혼을 불어넣으시어
구릿빛 가죽만 남으신 어머니,
바람개비처럼 가벼운 줄 알았더니
어머니 지신 짐이 이리 무겁다니요
날아갈 듯 누우신 오 척 단신에
이리 무거운 짐 벗어놓고 떠나시다니요
이 짐을 지고 버티신 세월
억장이 무너지고 넋장이 부서집니다
구멍이란 구멍에 목숨 들이대시고
바람이란 바람에 맨가슴 비비시어
팔 남매 하늘을 떠받치신 어머니,
당신 칠십 평생 동안의 삶의 무게가
마지막 잡은 손에 전류처럼 흐릅니다
당신 칠십 평생 동안에 열린 산과 들의 숨소리가
마지막 포옹에 화인처럼 박힙니다
얘야, 나는 이제 너의 담벼락이 아니다
나는 네가 머물 반석이 아니다
흘러라
내가 놓은 징검다리 밟고 가거라
뒤돌아보는 것은 길이 아니여
다만 단정하게 눈감으신 어머니
아흐,
우리 살아생전 허물과 죄악을
당신 품 속에 슬몃 밀어넣고
배옷 한 벌로 가리워드립니다
그래도 마다 않고 길 뜨시는
어머니……

고정희의 시에서 우리는 딱히 덧붙일 말조차 찾지 못한다. 시 한 편이 모든 것을 말하고 있고, 이 시는 그 자체로 모든 것을 투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눈여겨볼 것은 바로 "얘야, 나는 이제 너의 담벼락이 아니다/나는 네가 머물 반석이 아니다/흘러라/내가 놓은 징검다리 밟고 가거라/뒤돌아보는 것은 길이 아니여"라는 부분이다. 자신이 더 이상 자식을 지켜줄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면서, 그리워하거나 후회하지 말고 그저 흘러서 앞으로 나아가길 당부하는 부모의 마음.


그런 부모에게 우리가 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기껏 허물과 죄악일 뿐이다. 미처 몰랐기 때문에 저질렀던 잘못들로 흘리는 후회의 눈물이 수의를 적시고 있을 뿐이다.


3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중에서 어머니의 사랑은 아들과 딸 할 것 없이 절대적인 것이다. 어느 페미니즘 서적에서 읽은 기억이 있다. 그 내용에 따르면, 임신이라는 경험을 통해 한 여자는 타자와의 특별한 관계를 경험하게 된다. 자신의 몸과 연결되어 있지만,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태아를 통해 복합적인 감정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내 몸의 일부이지만, 결코 나의 일부가 아닌 타자. 이 특별한 경험이 어머니를 강하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몸속에 있었으므로 누구보다 자식을 사랑하지만, 결국 타자였으므로 누구보다 자식에게 엄할 수 있다.


어머니는 그래서 자식에게 사랑과 공포의 존재가 된다. 많은 생명을 길러내어 결국 자신의 품으로 거두어들이는 드넓은 대지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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