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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선생 Dec 26. 2018

그의 이름을 불렀는데 왜, 꽃이 왔지?

김춘수의 시 <꽃을 위한 서시>와 <꽃>의 부분들

언어의 폭력 혹은 한계?


김춘수 시인은 언어와 진리의 관계를 고민한 시인으로 유명하다. 그의 시적 여정은 의미와 무의미 사이에서 헤맴을 보여준다. 가장 쉽게 감상할 수 있는 시의 부분들을 보면 아래와 같다.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 <꽃을 위한 서시> 부분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이, 이 시는 언어의 한계를 이야기하고 있다. 흔히 문학 교육 현장에서 시인은 언어의 도구적 사용에서 멀어진 사람이라고 이야기한다. 소설가가 언어를 통해 어떤 의미를 찾아 나서고 있다면, 시인은 언어 자체가 목적이고, 언어 자체가 곧 의미가 된다. 그런데 언어가 도구적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을 때, 그 언어는 의미를 상실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면 '나무'라는 언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그 기호를 통해 실재하는 그 식물을 떠올리기 위함이다. 그러나 시인이 말을 도구로서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 언어는 도대체 무엇을 드러낼 수 있다는 말일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꽃> 부분


결국 우리는 언어의 기능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 그것은 '그'를 '꽃'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힘이다. 이는 언어의 자의성을 생각하게 한다. 나무라는 기표는 그것이 지칭하는 식물(기의)과 필연적으로 결합하지 않는다. 따라서 기표에서 기의를 삭제하는 일이나, 어떤 기표에 새로운 기의를 부여하는 일(상징이나 은유)이 바로 언어를 도구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작업인 것이다. 


김춘수의 꽃은 바로 그런 시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는 그가 아닌 꽃이 된다. 우리의 언어는 이런 측면에서 창조적일 수도 있지만, 폭력적일 수도 있다. 말을 사용하는 주체는 타자의 실존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저 내가 파악할 수 있는 형태로 붙들기를 바랄 뿐이다. 그래서일까, 김춘수의 시는 아름다운 시로 읽힐 수도 있지만, 우리가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수많은 고통을 드러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도대체 우리의 언어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의 언어는 진정 그에게 닿을 수 있을까. 만약 닿을 수 없다면, 나를 향해 다가오는 그는 도대체 누구인가. 마찬가지로 그가 부르는 나는 누구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느끼게 되는 정체성의 고민과 밀접하게 닿아 있는 것이기도 하다. 영원히 풀리지 않는 그 질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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