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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선생 Sep 30. 2021

문지기는 문을 여닫을 수 있다

김행숙, 「문지기」

'차차차'는 다 함께 차차차밖에 모르는 나에게 "갯마을 차차차"는 낯선 제목이었다. 아내가 흥미롭게 지켜보는 드라마이기도 하고, 많은 사람에게 인기를 얻는 모양이다. 드라마에 이런 시가 등장했다고 한다. 책을 읽던 등장인물은 차마 모두 읽어내지 못했다고 한다. 자신의 마음과 달랐기 때문일까, 아니면 자신의 마음과 닮았기 때문일까. 드라마를 보지 못한 나로서는 도무지 모를 일이다. 다만, 주인공의 내면을 잘 드러낼 수 있었던 '좋은 인용'이었다는 찬사를 덧붙여 둔다(http://www.slist.kr/news/articleView.html?idxno=288976).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내 직업이다.
당신의 목적을 부정하는 것이 내 직업이다.
다음 날도 당신을 부정하는 것이 내 직업이다.
당신을 부정하기 위해 다음 날도 당신을 기다리는 것이 내 직업이다.
그다음 날도 당신을 기다리다가 당신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 내 직업이다.
그리하여 나의 사랑을 부정하는 것이 나의 직업이다.

나의 천직을 이유로 울지 않겠다, 라고 썼다. 일기를 쓸 때 나는 가끔 울었다.

썩 탐탁지 않다는 것은 알지만, 이 시가 김행숙 시인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배제하기 힘들다. 남성 시인과 여성 시인의 작품을 나누는 문학연구의 전통에 따르면, 시에 등장하는 화자의 목소리가 그리 달갑게 들리지만은 않는다.


사랑에 능동적일 수 있는 '성(性)'이 따로 정해진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능동적으로 사랑을 쟁취하는 모습이 여성에게까지 연결된 시간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화자의 모습이 현재를 살아가는 여성에게 답답하고 불편해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문지기는 문을 지키는 사람이다. 그러나 문을 지키는 사람이 반드시 누구도 들여보내지 않는 역할만 수행하지는 않을 터이다. 시에서 말하는 '당신'이 출입을 허락할 수 없는 '그 당신'이라고 한다면? 스스로가 아니라 '머리'의 명령으로 마음을 문을 잠글 수밖에 없었다고 해도 달갑지만은 않다. 게다가 이것이 나의 천직이라고 생각하며 일기를 쓰다가 가끔 울 정도라니……. 당당하게 거부하지도 못한 채 남몰래 당신을 기다리는 모습이 심지어 직업이라니 착잡하기만 하다.


지울 수 없는 마음의 상처 때문에 문을 걸어 잠그는 사람이 있다. 바로 드라마 속 주인공이 그러한 모양이었다. 드라마의 맥락을 떼어 놓고 이 시를 볼 때, '천직'은 '여성'이라는 '젠더'로 연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시인 자신이 '여성'임을 내세우면서 수동적인 문지기를 형상화했다면, 그것은 '여성의 마음'을 철저히 단속당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가부장제' 사회를 향한 비판으로까지 읽힐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드라마를 보지는 못했으나, 앞의 기사에서 본 바 주인공이 시를 끝까지 읽지 않았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마음의 상처를 입은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하는 당신을 마음에 들이지 못하는 상황을 드러낸 이 시는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본 듯 느껴졌을 것이다. 어쩌면 이 시의 내용을 부정하면서 자신은 문을 열어젖히는 문지기가 되겠다고 다짐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마 후자에 가깝겠다. 흥겹게 차차차를 즐기는 갯마을에서 마음의 문을 닫은 채 살아가는 일이 처음부터 가능하기나 했을까. "근심을 털어놓고 다 함께 차차차 슬픔을 묻어놓고 다 함께 차차차"라는 설운도 씨의 노래가 떠오른다.


당신 마음의 문을 여닫을 수 있는 자 오직 자신 뿐임을 기억하소서. 마음의 문을 열어 놓아 그들이 드나듦을 지켜보소서. 끊임없는 만남과 작별이 당신 마음을 충만히 할 것임을 기억하소서. 그렇게 사랑하소서. 그렇게 살아가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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