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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선생 Oct 27. 2022

슬픔의 힘, 기쁨과 슬픔의 역학

  인터넷에서 시는 이미 죽었다고 말한(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06125#home) 정호승 시인의 작품이다. 정호승 시인의 원리대로라면, 나도 결국 정호승 시인의 시를 죽이고 있다. 시 작품을 정확히 표기하고 낭송하는 것에 의미를 둔다면, 잘못 표기된 글자와 연, 행 구분이 고의적 살인이든 과실치사든, 시인의 작품을 죽이는 일일 수 있겠다. 연구자가 논문에 시를 인용할 때 '정본' 여부를 중시하는 것도 정확한 작품을 분석해야만 정확한 의미가 도출되기에 그러하겠다. 


  다만, 이 글은 정호승 시인의 작품을 발판 삼아 나의 생각을 들려주기 위한 행위임을 밝힌다. 더불어 시 작품을 인용한 지면을 밝혀 두었으니, 혹여 오류가 발견된다면 해당 출판사에 오류를 바로잡아주십사 요청할 수 있으리라.




①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②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 값을 깎으며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 주겠다
③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 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 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 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④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함박눈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⑤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길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정호승의 「슬픔이 기쁨에게」(『바로 읽는 한국어』6, 30면에서 재인용)  


  ‘슬픔’이 ‘기쁨’에게 보내는 시이므로, ‘나’는 ‘슬픔’, ‘너’는 ‘기쁨’이겠다. 슬픔은 슬픔에 빠진 사람들과 그들의 세계일 수도 있고, 기쁨은 이기적으로 기쁨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자들과 그들의 세계일 수 있겠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감정일 ‘기쁨’에게 ‘슬픔’을 전하겠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슬픔은 사랑보다 소중하다고 말한다. 이 구절만으로 독자들이 무릎을 ‘탁!’ 칠만한 공감을 얻으리라 장담할 수는 없겠다.     

  그래서 ‘슬픔’은 ‘기쁨’에게 슬픔을 주려고 하는 이유를 ②, ③, ④로 보여준다.




  ②번에서는 추위에 떨며 귤을 파는 할머니에게 가격 흥정을 하는 기쁨의 이야기가 나온다./ 값을 깎는 일은 나의 기쁨을 위한 것이고, 할머니의 기쁨을 방해한다. 지출을 줄였다는 기쁨은 언제나 수입을 줄이는 ‘폭력’으로 성취된다. 그러니 5천 원을 받아야 할 할머니에게 4천 원만 건네면서 돌아오는 기쁨 뒤에는 할머니의 슬픔이 존재한다. 


  ③ 길거리에서 가마니 한 장을 덮고 쓰러진 노숙인을 모른 채 돌아가는 기쁨에게 슬픔은 돌연 기다림을 주겠다고 말한다. 기쁨에게 주려던 것은 슬픔이 아니었는가? 가마니를 덮은 노숙인이 ‘수면’ 중인지, ‘영면’에 들 위험에 처한 것인지 살펴주는 마음이 없는 기쁨에게, 이웃의 관심과 손길을 ‘기다리다’ 죽어갔을 노숙인의 기다림을 주겠다고 말한다. 이미 싸늘한 주검이 된 노숙인은 신체적 죽음과 함께 정서적 죽음을 맞은 것이다.     

  결국, 기쁨과 슬픔은 기다림의 시간과 관계가 있다. 기다림의 시간이 짧을수록 기쁨을 느끼는 횟수는 늘어난다. 내가 원하는 물건을 당장 가질 수 있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면 기쁨은 늘어난다. 반대로 기다림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기쁨은 줄어들고, 슬픔이 늘어난다. 지금 당장 원하는 것,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 없을 때 슬픔이 늘어난다는 말이다.     


  ④ 시인은 ‘기다림’의 상징으로 ‘함박눈’을 멈추겠다고 말한다. 눈 내리는 성탄절을 바라는 사람이 많다는 점과 성탄절 밤, 눈을 맞으며 죽어간 성냥팔이 소녀를 떠올릴 수 있다.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성냥으로 몸을 녹이던 성냥팔이 소녀에게 눈은 행복한(슬픈) 상상 속에 죽어갈 수 있었던 건 눈이 내린 덕이 아닐까. 


  슬픔은 이른 봄, 보리 밭에 내리던 봄눈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에게 다녀오겠다고 말한다. 원하는 것을 누구보다 빨리, 충분한 기다림 없이 가진 사람들에게 내리던 함박눈을 추위에 떨며 기쁨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보여주려는 것이다. 그렇게 눈이 그친 길을 기쁨과 함께 걸어가겠다고 말한다.      


  걸어가는 길에 슬픔의 힘에 관해 이야기하겠다고 말한다. 원하는 대상을 향한 거리에 따라 늘어나는 슬픔에 무슨 힘이 있을까? 아무래도 그것은 당장 누리는 기쁨에서 찾을 수 없는 ‘깊이’가 아닐까 싶다. 




  요즘은 누구나 현재를 즐기라고 말한다. 당장 누릴 수 있는 기쁨에 집중하라고 말한다. 멀리 있는 대상을 향한 갈망으로 슬픔에 잠기기보다, 작지만 확실한 기쁨을 누리라고 말한다. 우리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심지어 심리상담가를 비롯한 여러 사람도 비슷한 조언을 한다. 현재의 기쁨에 집중하라고.


  기쁨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슬픔을 느끼는 사람이 존재함을 잊고는 한다. 인내심이 부족한 기쁨은 인내하는 슬픔을 쉽게 비하한다. 그러나 슬픔은 기쁨이 누리지 못할 깊은 기쁨을 맞이할 수 있다. 그것이 슬픔의 힘이 아닐까.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나를 위해 자신의 기쁨을 기꺼이 밀쳐놓은 부모님, 누군가의 마음을 갈취하기 위해 폭력을 쓰는 대신, 마음속에 담아두고 먼발치에서 응원하는 바보 같은 사람, 하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육신의 쾌락과 지상의 곳간을 기꺼이 포기하는 사람들의 슬픔이 지닌 힘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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