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어 우먼과 커리어우먼
care woman & career woman
2018년 12월 16일에 방송된 SBS 일요스페셜의 제목은 <아이, 낳을까 말까>였다. 인류의 역사는 물론이고, 우리의 전통 속에서도 여성은 줄곧 출산과 육아 담당자로 규정되어왔던 탓에, '아이를 낳을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는 여전히 여성의 삶의 방향을 설정하기 위한 근본적인 질문이 되고 있다.
이른바 '한강의 기적'이라는 거시적인 성과에 가려졌지만, 미시경제를 책임지고 있었던 것은 여성이었다. 전후부터 60년대까지를 배경으로 하는 문학이나 텔레비전 드라마 등에서 남성은 올바른 구실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술에 절어 폭력을 일삼는 남편 그로부터 가정을 지켜내는 아내의 이미지는 과거 우리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대표한다. 내가 학위 취득을 위해 공부한 시인 김수영의 경우도 그의 아내가 집안 경제를 책임지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는 거대한 이상을 꿈꾸는 동시에 생활에서의 패배감에 고통스러워하는 남성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와 동시에 그의 시와 산문에서는 아내를 무시하거나 여자를 낮춰보는 표현들이 많이 등장하고, 그래서 그는 여성비하적인 태도를 지닌 대표적인 시인으로 평가되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의 문학에 나타난 그러한 인식들이 실제 삶과 일치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의 아내가 몇 해 전 펼쳐낸 회고록에 따르면, 김수영은 아내에게 한없이 따뜻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요점은, 우리 사회에서 여성은 언제나 생산자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지만, 국가라는 거대한 공동체의 발전에는 참여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가정의 존속을 위한 재생산 역할만을 담당한 것처럼 여겨졌던 것 같다는 점이다. 그러나 국가의 근간은 국민에 있고, 출산과 양육을 도맡았던 여성이야말로 국가의 존속을 책임지는 존재였다(주권과 영토, 국민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국민이다. 땅이 있어도 살 사람이 없으면 안 되고, 그렇다면 주권을 행사할 주체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남성들이 정치 경제 등의 추상적이고 이상적인 활동에 사활을 걸 수 있었던 것 역시, 여성의 내조(재생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성 사회는 이를 충분히 인정하고 존중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일까, 여성들의 목표는 답답한 생활에서 벗어나, 사회로 도약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캐어 우먼에서 커리어 우먼으로 전향이 시작된 것이다.
현재는 대부분의 여성들이 사회생활을 하기를 원한다. 혹은 그런 것처럼 이야기된다. 화려한 커리어 우먼이 되고 싶은 욕망은 대부분의 여성들이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와 동시에 결혼을 해서 전업주부로 살아가는 여성들은 "답답한" 혹은 "한심한"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되기도 한다. 이른바 '취집'을 원하는 여성들을 남녀 불문하고 비난하는 경우를 자주 목격하기도 한다. 그 속에는 남성의 부와 권력에 기대어 살아가고자 하는 수동적인 여성의 욕망이 반영된 것처럼 보인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적지 않은 여성들, 그리고 페미니스트들이 말하는 것처럼, 오랜 시간 동안 여성에게 주어졌었고 기꺼이 감내할 만한 가치가 충분한 역할조차 무조건 부정하는 것은 여성의 과거와 정체성 전반을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에서 주의가 필요하다. 심지어 커리어 우먼으로서의 성공을 중심으로 하는 여성의 인식 변화가 페미니즘에서 추구하는 여성해방의 목적지인지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여성해방이 곧 여성의 사회진출이라면, 그 이익이 결국 누구에게 돌아가는 것인지가 궁금해지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은 캐어 우먼에서 커리어 우먼으로의 사고 전환은 젠더적 남성의 전 사회적 확대를 이야기하는 것이고, 결국 남성 사회의 확장과 고착화를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적잖은 페미니즘 이론서에서 근대의 젠더를 남성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여성은 근대화 과정에서 철저히 배제된 것으로 판단하고는 한다. 그리고 한편에서는 여성이 근대화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는 데에 주체적인 역할을 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리타 펠스키 같은 경우, 대량생산을 바탕으로 하는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은 소비의 주체이기도 한데, 여성은 자본가들의 타깃이면서도, 자본가들을 좌지우지하는 주체인 이중적인 성격을 지닌다고 말한다.
그러나 리타 펠스키의 분석은 여성의 지위를 충분히 끌어올리지도 못하고, 여성만의 긍정성을 확실히 보장해주지도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이유는 근대성 자체가 남성적인 것이고, 따라서 근대사회의 생산주체가 대부분 남성이라고 가정했을 때, 그들이 여성의 눈치를 본다는 것은 '더 큰 승리(생산성을 확대하고 사회적 지위를 굳히는 일)'를 거두기 위한 '전략적인 포즈'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여성을 '유행을 선도하며, 산업의 흐름을 좌우하는 주체'로 포장하면서, 더 큰 이익을 챙기는 것은 결국 '남성적 생산주체'로 보이기 때문이다. 여성의 사회진출이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가사부담은 여전하다는 통계 결과가 이를 뒷받침한다. 사회는 모든 구성원의 남성화를 추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남성 생산주체가 만들어낸 상품들을 소비하는 주체로만 여겨졌던 여성이 생산주체로서 사회에 진출하게 되었지만, 그들이 '커리어 우먼'으로 성공하기 위해 노력하면 할수록 이른바 "남성적 근대"에 종속되고 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이는 페미니즘 내부에 존재하는 비판적 목소리와도 맥이 닿아 있다. 여성들이 남성의 위치를 공유하려고 하는 방향으로만 전개되는 것처럼 보인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게 남성이 누리던 삶을 동일하게 누리고자 한다면, 여성주의는 더 이상 나아갈 방향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더 이상 남성과 여성의 구분이 불필요하다면, 여성주의는 사라지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야말로 여성주의, 그러니까 페미니즘의 진정한 목적이어야 할 것은 분명하지만, 그 방향은 어쩐지 씁쓸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