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 어딘가에는 나와 동일한 사람이 존재한다고 한다. 그들을 지속적으로 마주치게 되면 죽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나와 똑같은 사람’ 때문에 죽음을 당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인간은 남과 달라야만 살아갈 수 있다는 의미일까. 이 세상에 ‘나[余]’는 오직 하나뿐인 존재여야만 하므로, 나머지 하나[余]를 제거하려고 하는 것은 당연하니까 말이다.
남과 달라야만 한다고 말하는, 이른바 개성의 강조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일종의 강박을 안겨준다. 오직 나만이 누릴 수 있는 특별한 삶을 찾아 나서지만, 이내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공유’되어 버린다. 각종 소셜미디어의 난립으로 인해서, 이제 나만의 개성을 쉽게 노출되고, 나의 도플갱어들이 도처에 존재한다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 그것이 자본에 의해 재생산이 되어버리면, 나를 개성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고 믿었던 ‘잇템’이, 결국 나를 다른 사람들과 동일한 소비자로 만들어버린다. ‘개성의 역설’이라고 해야 할까, ‘개성’을 좇아가지만 결국 내가 마주하는 것은 ‘보편성’ 뿐이다.
1인 방송이 유행하고 있다. 다양한 콘텐츠가 생산되므로 개인의 취향에 맞는 것을 골라서 시청할 수 있다는 장점을 홍보한다. 그러나 그러한 홍보와 달리 사실상 콘텐츠는 ‘동일성의 무한 증식’에 불과하다. 아무리 다양성을 추구하려고 몸부림친다고 해도, 먹기, 사기, 가기, 자극하기, 위로하기, 뽐내기, 조롱하기, 전시하기 말고는 없다. 다만 ‘누가’, ‘어떻게’, ‘무엇을’ 먹고, 사고, 자극하고, 위로하고, 뽐내고, 조롱하고, 전시하느냐는 차이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차이가 아니다 같은 류에 속한 수많은 종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그것은 기존 미디어에 대한 불만이 새로운 플랫폼에서는 만족스러운 것처럼 보이는 현상일 뿐이다. 대한민국이 싫어서 이민을 갔던 사람이 결국 그곳도 사람 사는 곳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남과 달라지기 위해서 남을 모방한다. 그리고 남을 모방하면서도 남과 다르다고 말한다. 천편일률적인 미의 기준을 비판하지만, 결국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고 싶은 욕망을 벗어버리지는 못한다. 비싼 화장품을 대신해서 가성비 좋은 화장품을 살뿐이다. 특정 브랜드를 비판하면서도 외제차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천정부지 치솟는 집값을 비난하면서도 도심을 포기하지 못하기도 한다. 결국 우리는 나 자신을 한갓 소비자(‘호구’ 또는 ‘흑우’)로 만들 뿐인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이야기하면서도 소비의 미덕을 차마 부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가 ‘개성’을 갖추는 것은 단독자가 되는 일이 아니라, 이른바 ‘인싸’가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집단의 동일성을 거부하고 나만의 특성을 찾아 나서는 여정이 아닌, 유력한 집단의 동일성을 모방함으로써 ‘인싸’가 되기를 희망하는 것이 개성의 정체인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다(브랜드 아파트, 불이 나도 타야 하는 외제차, 소유하지만 향유할 수 없는 명품, 반드시 불운이 닥쳐야 한다고 부추기는 것처럼 보이는 각종 보험 연금 상품들). 진화론자는 이것을 사회적 존재로 살아온 인간의 유전자 때문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인싸가 되기를 거부하는 것은 유구한 역사를 지닌 인류의 본성과는 대치되기 때문이다.
언젠가 한 친구가 뉴질랜드에 살고 있다는 한국인 페이 닥터 이야기를 했었다. 그는 의사가 부족한 병원과 계약을 맺고 일정기간 동안 일하며 돈을 벌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나머지 6개월 정도는 자신이 좋아하는 스포츠 심판으로 활동하면서 여가를 즐긴다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대단히 부럽다고 생각하고, 한국에서는 꿈꾸기 힘든 삶이라는 이야기도 곁들였다. 이미 지난 월드컵 때에도 어느 국가대표단이 ‘투잡’ 선수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말을 했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의 직업은 단순한 직장인이라기보다 전문직에 가까웠고, 그러한 직업을 갖지 못한다면 그와 같은 투잡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한다. 수년 전 ‘직장인 밴드’라고 하면서 소개했던 사람들이 사실은 의사들이었던 경우를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결국 특별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사회의 ‘인싸’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려면 결국 남들과 똑같은 공부를 해야 하고, 시험(경쟁)에서 우위에 서야 한다. 다시 말하면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위해서는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어쩌면 진정한 개성[個性]은 여성[余性] 인지 모른다. 10%의 의식이 미처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90%의 무의식. 평생을 어두운 내면에 남겨진 채 죽음의 순간까지 쓰이지 못할 나의 나머지. 우리는 그것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하고 또 포착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90%의 농도 짙은 무의식을 10%의 의식으로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 유명한 정신분석조차도 무의식의 중요성을 알리는 데에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무의식 전체를 감당해내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서글프게도 우리는 “남의 떡이 커 보이고, 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프다”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것도 수긍하고 있다. 결국 우리는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며, 그것을 갖지 못했을 때 고통스러워한다.’ 그리고 누군가 ‘나를 찾을 때, 그것은 분명 나에게 어떤 식으로든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생각한다(아무 소식 없이 지내던 친구가 결혼을 한다네?). 그리고 이러한 속담의 진리를 애써 밀어내려고 한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어야 한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의식을 마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나답지 않은 것’을 발견하는 그 순간에 그것을 내치지 않는 것이다. 추악한 본능이나 욕망을 마주했을 때, 그것을 쓰레기통에 처박아 놓기만 한다면, 언젠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넘쳐흐를 것이다. ‘여성[女性;余性]*’의 복권, 불필요성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나머지의 나를 인정하는 일의 중요성은 무한반복이 아깝지 않다.
*여성[女性]은 인류가 이분법적인 상징체계를 확립하면서 언제나 여성[余性]으로 남아 있었다. 따라서 여성주의[女性主義]는 여성주의[余性主義]이기도 하다. 인류가 진정한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 여성[女性]을 온전히 받아들여야 하는 것처럼, 나의 진정한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여성[余性]을 온전히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므로 ‘여성주의’는 모든 인류를 위한 귀중한 사유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