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about THINGs

알루미늄 냄비

by 정선생

생명체는 생명활동이 끝나면 자연히 사라진다. 타의로 파괴되는 경우도 많지만, 그 파괴됨이 거대한 자연 속에서 새로운 생명의 탄생으로 이어진다는 게 위안을 준다.


물건은 그렇지가 않다. 신이 아닌 사람에 의해 창조된다. 쓰임이 다하지 않았음에도 버려지고, 완전히 떠나지도 못한 채 세상을 떠돌기도 한다. 위대한 자연을 흉내 내며 재활용, 재사용이라는 방식을 만들었지만, 물건의 운명은 순환과는 거리가 멀다.


사람은 쓰임이 없다. 어리면 어린 대로, 성숙하면 성숙한 대로 늙으면 늙은 대로 생명이 꺼지지 않는 한 자신의 몫을 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물건은 다르다. 새 물건이 우대받고, 오래된 물건은 천대받는다.


사람의 생명을 물건의 기능에 빗댈 수 있다. 근육이 줄고 뼈가 약해졌음에도 버려지는 사람은 없다. 버려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칠이 벗겨지고 잔 고장이 많은 물건을 두고 고쳐야 한다 살려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적어도 이 시대에는 적다. 그래서 버려진다.

결혼 전 도배장판만 해 놓은 텅빈 신혼집에서 간단히 먹고 지내기 위해 어머니께서 사주셨던 냄비.

내가 이 집에 오기 전, 그러니까 신혼집으로 장만한 이 오래된 아파트에 도배장판만 새로 해 놓고 지낼 때, 어머니께 작은 냄비 하나를 챙겨주십사 부탁했다. 어머니는 동네 마트에서 알루미늄 냄비 하나를 사 주셨다. 나는 이 냄비로 라면이나 '삼 분 카레'를 데워 먹으며 가끔 이 집에서 생활했다.


이 냄비가 칠이 좀 벗겨졌다. 결혼하기 전이었다면, 아이가 태어나기 전이었다면 신경 쓰지도 않았을 일이다. 이건 내가 라면 끓여 먹을 때만 쓸 테니, 다른 음식을 만드는 데는 쓰지 말라고 했다. 그러다 이번에 새로운 편수냄비를 사야겠다는 말에, 결국 이 녀석을 보내야 하는구나 생각했다.


버리지 않아도 그만이겠으나, 새로운 냄비를 사야겠다는 말의 잉여 정보를 알아채지 못해서야 쓰겠는가.


모쪼록 물건의 생명은 이토록 보잘것없다. 아직 물을 담을 수 있다고, 불을 견딜 수 있다고 말하는 이 녀석에게 사람인 나는 이런 핑계를 댈 수밖에 없다. "표면이 벗겨지면 몸에 좋지 않아, 물을 끓이다 보면 자꾸만 안 좋은 성분이 베어 나올 거야"라고 말이다.


신은 자신의 필요 때문에 사람을 데려가지 않는다. 사람은 자신의 필요 때문에 물건을 만들고 버린다. 사람이 신이 될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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