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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선생 Oct 22. 2021

병명(甁命)

뚜껑도 없고 포장지도 뜯어버린 병의 정체를 알아차리기란 쉽지 않다
이런 모양의 병은 커피를 담는 병의 모양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에, 이것이 커피를 담았던 병임을 알겠지만, 앞서 이런 병을 경험하지 못한 이가 이 병의 정체를 단번에 알아차리기란 쉽지 않다.

때로는 자신이 갖고 있던 이름과 형식과 내용물을 버리고, 온전한 자신을 추구하며 살아가고자 한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이미 그의 정체를 알고 있고 그가 뜯어버린 옛 모습을 굳이 상기시키며, 새로움을 향한 그의 열망을 짓밟으려 할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용서하고 이해하고 편견 없이 사랑하며 응원하는 일이 가능할까? 찌그러뜨리고 갈기갈기 찢어서 재활용하는 대신, 재사용되기를 바라는 일이, 혹은 그 자체로 존재 의미를 얻으려고 하는 일이, 이 알루미늄 병의 바람은 얼마나 이루어질 수 있을까?

한 손으로 움켜쥐기만 해도 쉬이 구겨지고 마는, 아직도 커피 향이 어렴풋이 느껴지는 알루미늄 병을 슬며시 쥐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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