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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선생 Apr 27. 2022

차마 떼려야 뗄 수 없는

깻잎 논쟁에 관한 단상

  2022년, 이른바 ‘깻잎 논쟁’이 방송에서 자주 보인다. 깻잎장아찌를 떼어 먹기 힘들어하는 사람 특히, 이성(異性)을 도와주어야 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벌어지는 논쟁이다. 보는 이에 따라서 굉장히 중요한 문제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 논쟁은 필자 개인적으로는 수년 전, SBS 예능 프로그램 <동상이몽>에 출연한 연예인 노사연 이무송 부부에게서 처음 접했다. 그 당시에는 ‘깻잎 한 장 떼어 주는 것이 뭐 그리 큰 문제인가, 지나치게 질투를 느끼면서 배우자를 괴롭히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리고 얼마 전 KBS 예능 프로그램 <1박 2일>에서 연정훈 한가인 부부가 출연하며 다시 한번 전파를 탔다. 연정훈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었지만, 아내의 말을 듣고 보니 아내의 말이 옳다고 했다. 깻잎 떼어주기에 절대 반대하는 한가인은 졸지에 ‘유교’ 신봉자가 됐다. <옥탑의 문제아들>에서도 이 논쟁이 언급됐는데 배우 송지효가 말한 것처럼, 자신의 파트너에게 떼어 주라고 귀띔한다는 대답조차도 일부 사람에게는 불쾌할 수 있다. “아니, 도대체 왜 내 친구 젓가락질을 네가 신경 써?”

  지금 와서 생각하니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나 보다. 깻잎 논쟁은 MBTI와 더불어 이 시대에 한 개인의 인간성을 테스트하는 유용한 방법처럼 보이기조차 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MZ 세대가 주류라고 일컫는 이 시대에 케케묵은 사랑 관념처럼 보이는 배우자를 향한 질투가 가당한 일인가 싶기도 하다. 개방적인 사유, 상대방을 얽매지 않는 상호 존중 같은 것이 이 시대의 통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나 자신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사랑조차도 나 자신만의 사랑이어야 하는 것인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또는 뿌리 깊은 불신의 시대일 수도 있겠고 말이다.     


  깻잎장아찌는 여러 장이 양념을 머금으며 붙은 형태여서 젓가락질이 서툰 사람은 그것을 떼기가 힘들다. 젓가락질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번거로운 일이기는 하다. 솔직히 젓가락으로 깻잎 꼭지를 잡는 동시에 숟가락으로 아래에 있는 깻잎을 누르면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그러나 여럿이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자신의 밥과 국을 퍼 먹던 숟가락으로 깻잎을 짓누르기란 쉽지 않다. 특히 위생 관념을 중시하는 요즈음 시대에는 더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깻잎 논쟁’은 깻잎을 떼어 먹지 못하는 이가 ‘이성(異性)’이라면, 그를 돕는 것이 ‘이성적(理性的)으로’ 타당한가를 문제 삼는다. 여기에서 이성적으로라는 단서를 붙이는 이유는 그것이 논쟁이라는 형식으로 회자되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이와 더불어 ‘깻잎 논쟁’에서는 옆에 배우자 혹은 연인이 동석하고 있음을 전제한다. 우리는 곤란에 처한 사람을 외면하면 안 된다는 ‘착한 사마리아인’ 혹은 ‘박애주의자’이기를 선택하거나, 오직 나의 파트너만을 챙기는 ‘자기애적인 태도’를 취해야 한다. 여기에서 착한 사마리아인과 박애주의자의 반대편에 자기애를 내세운 이유는 개인주의적 자기애야말로 낭만적 사랑을 향한 갈구와 연결된다는 이론에 근거해서이다(크리스티안 슐트의 『사랑의 코드』, 니클라스 루만의 『열정으로서의 사랑』을 참고)     

  크리스티안 슐트에 따르면, 사랑은 자신을 완성하기 위한 중요하고도 유일무이한 수단이다. 현대사회에서 개인은 특정한 역할을 연기하며 사회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데, 이로 인해 완전한 개성을 유지할 수 없다는 위기감을 느낀다. 사랑은 개인이 추구하는 완전한(혹은 온전한) 개성을 실현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다시 말해, 자신을 온전히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파트너를 만남으로써 진정한 개성을 실현할 수 있는 것이다(크리스티안 슐트, 위의 책, 136 참조).

  그러나 이와 같은 사랑은 곧 파트너를 향한 집착과 유일무이한 동일성으로 두 사람의 세계를 형성하려는 욕구를 낳는다. 즉 나의 파트너는 오직 나의 개성을 완성하기 위해서만 존재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의 친밀한 관계를 형성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여긴다(그런 맥락에서 십여 년 전 유행했던 태양의 <나만 바라봐>는 나쁜 남자의 전형이 된다. 자신은 파트너만을 열정적으로 사랑하지 않지만, 파트너는 나만을 열정적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이율배반적인 태도를 직설적으로 나타냈기 때문이다).

  크리스티안 슐트는 게오르그 짐멜을 인용하면서 “사랑은 오로지 개성에 의해서만 점화되지만 극복 불가능성에 부딪혀 부서진다.”라고 쓴다(138). 다시 말해, 나의 개성과 상대방의 개성으로 불붙은 사랑은 그 개성이라는 장애물로 인해 결국 식어버리고 만다.

  이른바 ‘깻잎 논쟁’이 바로 이와 같은 모순을 증명한다. 상대방이 지닌 ‘친절함’이라는 개성으로 사랑에 빠졌지만, 바로 그 친절함이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약점이 되어 싸움을 일으키고, 최악의 경우 상호 이해에 도달하지 못해 이별을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깻잎 논쟁’에서 다루는 상황이 상대방이 자신의 개성을 지속하는 과정에서 일어난다면, 오히려 극복 가능성이 높다. 심지어 논쟁거리조차 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성격 자체이기 때문에 나를 향한 사랑이 식었다는 것과 같은 부정적 양상으로 전개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깻잎 논쟁’은 이미 오래 사귀었거나, 부부가 된 사람 사이에서 의미를 가진다는 점을 기억해 볼 필요가 있다. 이제 막 마음에 불을 지피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의 젓가락질이 눈에 보일 리가(가능성이) 없기(적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썸’과 ‘연애’, 그리고 ‘결혼’의 과정을 거치면서 상대방이 변해가는 모습을 보기도 한다. 처음에는 서로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하다가, 긴장감이 점점 느슨해지면서 기대하지 않았던 모습을 보기도 한다. 그때 우리는 실망을 하고, 파트너가 처음처럼 변함없는 모습으로 나를 사랑해 주기를 바란다.

  만약, 파트너가 누구에게나 다정한 말투와 행동을 보인다면, 그는 진정한 박애주의자인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은 어디에도 없는 ‘착한 사람’이고, 따라서 어떤 사람이든 (종교적인 것에 가깝게) 사랑하려고 한다. 다만, 진정으로 사랑하는 한 사람과 나누는 농도 짙은 사랑은 따로 존재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만이 그에게 특별해지고 싶다는 욕구마저 지워버리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반대로, 사랑하는 기간이 점점 늘어나면서 소홀해지는 과정이었다면 어떨까. 낯선 사람 혹은 자신의 친구에게 다정다감하거나, 배려심이 넘치는 모습을 보면 쉽게 질투하거나 오해할 수 있다. 나에게는 쉽게 짜증내고, 쉽게 화를 내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던 그가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다른 이성에게 내가 기대하던 행동을 한다면 그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듯하다. 우리는 차별을 원하지 않지만, 그 차별의 내용이 나에게 부정적이라면 더욱 화가 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변하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시간 혹은 세월의 흐름 속에서 내가 아끼던 것이 변해가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내가 아끼는 물건은 사용하지 않고 고이 모셔두거나, 신상을 구입함으로써 이미 가지고 있던 물건의 변화를 견뎌낸다.

  사람의 감정도 마찬가지다. ‘죽마고우’를 갖기 힘든 이유는 그 친구의 변화를 온전히 우정으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내가 사랑하던 사람의 겉모습이 변해서 나에게 전달되는 시각정보가 만족스럽지 않거나. 내가 사랑하던 사람이 아이를 낳고 기르는 과정에서 예전의 말투와 행동이 사라지고, 우악스러운 모습에 실망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쉽게 이별하고 새로운 사랑을 찾아가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현재 나와 함께 하는 사람의 모습에 온전히 집중하고, 다른 사람에게 지금 내 파트너에게 대하는 것과 다른 상냥함과 친절함, 배려를 제공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내 곁에 있는 이 사람이 나로 인해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나로 인해 전적으로 행복이 결정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나로 인해 얻어야 할 행복에 관해서는 보장할 수 있다).

  깻잎을 떼어주는 일은 그래서 신중해야 한다. 아니 깻잎을 떼든 떼지 못하든 신경 쓰지 않아야 한다. “나도 깻잎을 먹어야하기 때문에 그것을 떼어 준다.”라는 논리도 깔끔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내 앞에 앉은 이성이 집어 올린 깻잎 몇 장 이외에도 그릇에는 한 두 장의 깻잎이 더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집어 먹으면 그만이다.

  그런데 이렇게 쓰고 보면, 너무 깻잎을 떼어주는 사람만을 비판하는 것처럼 보인다. 크리스티안 슐트의 문장을 하나 더 옮겨보고자 한다. “사랑은 있는 그대로의 상대를 사랑하는 것이지 앞으로 되어야 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변화의 희망은 사랑을 더 얽히고설키게 만들어 결국 자기애로 후퇴할 가능성이 높다. (…) 자기애는 안전하고 무한하기 때문이다.”(143쪽)

  이 글귀는 깻잎 논쟁에 흥미를 갖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의미 있을 듯하다. 조금 더 풀어쓰면, 사랑은 있는 그대로의 상대를 사랑하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사람의 모습으로 변해갈 것을 기대하며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이 나에 맞춰서 변해가리라는 희망은 큰 실망과 아픔으로 다가올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사랑의 아픈 기억은 나 자신에 고립되는 원인이 될 수 있다. 이 세상 모든 곳에서 나 자신만큼 안전한 곳은 없기 때문이다.      


  考 김현식이 이미 <사랑 사랑 사랑>에서 노래한 것처럼, “누구나 한 번쯤은 사랑에 울고 누구나 한 번쯤은 사랑에 웃고” 살아간다. 자신이 경험한 사랑이 앞으로 사랑하는 방식으로 고정될 수 있다. 수차례 사랑에 울었던 사람은 영원히 사랑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짧은 사랑만을 반복하기도 한다. 집착으로 점철된 사랑이기도 하고, 보편적인 통념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의 상호존중으로 사랑하기도 한다(이별이 두려워 상대방에게 지나치게 맞춰주는 사랑 같은 것이다). 아무튼 사랑의 첫 경험은 매우 중요하고, 이것은 결국 상대방을 통해 내가 어떻게 인식되느냐의 경험이기도 하다.

  깻잎을 떼어주는 사람이든, 깻잎을 왜 떼어주느냐고 불 같이 화를 내며 몰아세우는 사람이든, 내가 사랑하기로 선택한 사람이니, 그저 사랑하자. 혹은 그 사람이 지금까지 사랑해 온 여정이 어떠한 모습이었을지 헤아려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깻잎을 떼어주는 일이 그 사람에게 왜 그리 큰 상처를 주는 것일까를 헤아리는 일, 어쩌면 그것이 그 사람의 화난 얼굴을 다시 환한 얼굴로 바꿀 수 있는 험난하지만 유일한 길이 아닐까. 그게 진짜 자신과 파트너를 향한 의미 있는 사랑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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