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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선생 Feb 08. 2022

사람은 나무가 아니기에

내 손에 들린 벼린 도끼를 내려놓고 싶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 VS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더라     


나무가 참 좋다. 특히 오래된 나무를 보면 참 좋다. 그 나무는 스스로 온갖 고난을 겪어냈음은 물론이고, 그를 찍어 넘어뜨리려는 사람이 없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잘 견뎌왔고, 또 잘 어우러져 살아왔다.


데이트 폭력, 이별살인이 많아진다. ‘베르테르의 슬픔’은 이제 스스로를 향한 폭력이 아니라, 타인을 향한 폭력으로 변화하고 있다. 공익광고에서는 좋아하는 이성에게 수차례 거절당하는 친구에게 이런 조언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열 뻔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더라, 조금만 더 힘내” 그런데 한편으로는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고 했어, 그만 단념해”라는 조언을 하는 친구도 있겠다.     


“하면 된다”라는 다짐이 제법 오랜 세월 동안 힘을 얻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이기에 단념하지 말고 나아가라고 했다. 심지어 “그냥 해 보는 거야”라는 도전정신도 많은 각광을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구호는 ‘사업’이나 ‘과업’에 더 잘 어울림을 돌아봐야 할 듯하다. 사람 관계 속에는 오직 ‘체념’과 ‘단념’이 중요하다. 미련을 갖되 분노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윤리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설득하려고 하지 말고, 나무라지 않아야 한다. 물론,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가령 내가 악인에게 이르기를 악인아 너는 정녕 죽으리라 하였다 하자 네가 그 악인에게 말로 경고하여 그 길에서 떠나게 아니하면 그 악인은 자기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를 네 손에서 찾으리라(겔 33: 8)     


불같은 분노로 사람들을 대한 적이 많다. 그때마다 상대방을 열 번 찍어 넘어뜨리려고 했다. 어쩌면 한 번에 넘어뜨리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스스로는 결코 넘어지고 싶지 않았고, 열 번 백번을 찍혀도 넘어지지 않으려고 했다. 행여 누군가가 찍기라도 하면, 그를 더욱 몰아붙여 쓰러뜨리려 했다. 그렇게 부딪히며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 떠난 이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이런 실수를 범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듯싶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는 말은 허무해 보이기도 한다. 무한 긍정을 추구하는 현대 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그렇지만 어쩌면 그렇게 상대의 거절을 받아들이는 것이 사람 관계를 아름답게 만드는 방법인 것 같다. 상대방을 찍어 넘어뜨리려는 욕망은 타인을 소유하려는 욕망이다.


이제야 깨닫는다. 상대방은 그저 그렇게 서 있을 뿐이다. 정상에 올라 기필코 깃발을 꽂고야 말겠다는 등반가의 마음가짐조차 사람 사이에서는 불허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의 정수리에 무엇을 꽂겠다는 것인가. 그에게 오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오르는 것이 아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는 없다. 그러나 사람은 찍어 넘어뜨릴 수 있는(소유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많은 나무를 잘라 왔던 도끼를 내려놓는다. 이제는 베어낼 나무가 없음을 깨닫는다. 몇 그루의 나무를 심는다. 이 나무들만은 잘 보살피겠노라 생각한다. 아니, 서로 잘 어우러지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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