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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제제와 '밍기뉴'

by 정선생

인간의 뇌는 기억을 저장할 때 다른 감각정보를 함께 저장한다고 한다. '소리'가 대표적이다. 좋은 기억, 슬픈 기억 할 것 없이 당시의 청각 정보와 함께 저장된다. 새로운 음악 취향을 갖기보다는, 옛 노래를 반복해서 듣는 일이 늘어나는 것도 그 때문이겠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 대학생 시절에 들었던 노래가 플레이리스트를 빼곡하게 채우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인 듯싶다. 편안하고 행복했던 시절로 촘촘한 이불을 덮는 기분이랄까.


함께 일하는 조교 선생님과 일하던 졸업생에게서 전혀 모르던 가수의 노래를 접하고는 한다. 이번에 소개받은 곡 중에 '우효'는 들어보니 아는 노래였는데, 아마 옥상달빛의 라디오에서 몇 번 들었던 것 같다. 음악가의 이름은 이번에 알게 됐다.

정말 처음 들은 노래는 '밍기뉴'의 것이다. 엉뚱하게도 가야금 단조가 떠오르는 기타 선율이다(부산 국악동인 '담소'의 가야금 대금 연주는 지금도 뇌리에 깊이 박혀 있다).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에서 제제가 라임오렌지나무에 붙인 이름이라는 게 흥미롭다. 중학교 때 사서 대학교 때 겨우 다 읽은 책. 제제가 마음을 터놓고 의지하던 나무의 이름이, 음악가의 이름이라니. 아마, 이 시대의 수많은 제제에게 위로와 공감을 전하고픈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무에 이름을 붙여 대화하고 카우보이가 되기도 하던, 제제의 어린 시절이 어떠한가를 알기에 그런 것일까. 이 시대의 청춘이 제제보다 나은 삶이리라 생각하기란, 간단치 않다.


* 우효(OOHYO) - 민들레

* 밍기뉴 - 봄날은 간다

밍기뉴 - 나랑 도망가자(Run away with me)


며칠 전 학부장님께서 함께 읽자고 보내놓은 문학도의 시는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나의 가벼운 말장난과 달리, 그의 시에는 내가 사는 지구 중력의 몇 배가 느껴지는 탓이다. 좋은 시절, 한없이 밝은 웃음을 보여야 할 때가 아니냐고 꼰대력 높은 사람이 반문할 수도 있지만, 그의 시에는 내 삶을 압도하는 무게와 깊이가 있다.

젊은 사람이 좋아하는 노래는 으레 밝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무겁고 진지한 그 문학도의 시와 마찬가지로, 노랫말이나 곡조가 그리 밝은 편은 아니다. 이런 청춘의 모습을 두고 걱정하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청춘'은 사회와 국가의 '미래'를 짊어지고 힘차게 나아가야 할 존재들의 시절처럼 느껴지는 탓에, 우울하고 의기소침한 상태에 놓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탓도 있겠다.

그러나 청춘에게 희망을 품으라고 말하기에는, 세상은 꽃을 피우고 지속할 수 있는 곳이 아니고(<봄날은 간다>), 그렇기에 사랑하는 단 한 사람과 벗어나고 싶은 곳이다. 그러나 사랑조차도 봄날이 가듯, 영원히 지속할 수 없으므로 언제나 이별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별했다고 해서 사랑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에, 너의 죽음은 나를 슬프게 만들 소식으로서 의미를 지닌다(<나랑 도망가자>. 영원한 봄이 없음을 인정하고, 항시 이별의 가능성을 긍정하는 존재이기에, 이별은 계절의 순환 관정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다만, 똑같은 봄은 다시 돌아오지 않으므로 재회를 꿈꾸는 건 아니다. 재회(再會)가 아닌 재회(在回: 다시)가 있을 뿐이다(물론, 이 노래에서 말하는 '너'가 또 다른 나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가을과 겨울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적멸의 순간이 어떤 결과물인지 알기 때문이 아닐까. 봄과 여름,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사랑하고 살아내고 살아남은 자들만이 목격할 수 있는 적멸의 계절.

그 계절은 소란스러웠던 지난날을 추억 혹은 소화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으로서 사랑스럽지 않을까. 소멸과 생성이 절묘하게 겹치는 계절, 겨울. 청춘이 겨울을 노래한다는 것은, 그들이 새로운 봄을 맞을 힘을 갖추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웃음만 가득할 때 우정이 여물지 않듯이, 슬픔이 없을 때 행복이 싱그러울 수 없듯이, 봄날이 갔음을 진심으로 슬퍼하지 않으면, 진심으로 겨울을 끌어안지 않으면, 새로운 봄은 결코 시작할 수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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