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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선생 Sep 13. 2023

사랑의 지독한 난제, 몸과 마음

융과 바르트를 곁에 두고

사랑은 계산하지 않는 것이라고들 한다. 그렇지만 "사랑의 담론에서 계산이 완전히 배제된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만족감을 얻기 위해, 또는 상처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 (...)양보하고, 감추고, 상처를 주지 않고, 즐겁게 하고, 설득하고" 하면서 "때로 따져 보고 계산해 본다"라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종류의 계산은 어떤 '궁극적인 이익'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란다. '초조함'의 표현일 뿐이란다.


사랑하는 상대방을 향한 나의 행동은 어떤 목표를 취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헌신은 그 사람을 만족시키려는 행동이라기보다, 상대방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초조함' 때문일 수도 있겠다.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비난과 비판, 혹은 절규는 그 사람에게 상처주기 위함이 아니라, 상대방이 떠날지도 모른다는 '초조함'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래서 사랑에 빠진 사람의 행동, 혹은 그런 행동과 행동을 두고 이루어지는 치밀한 계산은 목표물 없이 표류하는 것일 뿐이란다. "사랑의 대상은 목표가 아니다. 그것은 객체로서의 대상이지, 종점으로서의 대상이 아니라"라면서 말이다.


롤랑 바르트의 힘을 빌렸다. 그의 『사랑의 단상』에서는 이렇게 주체와 객체의 완전한 합일 가능성으로서 '사랑'을 무한히 펼쳐놓는다. 물론 책이 끝나지 않는다는 건 아니다. 깊은 사유로 이끈다는 뜻이다. 사실 그가 읽은 작품들을 나는 모두 알지 못하고, 그래서 따라가기가 여전히 벅차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이 '에로스'로서 사랑에 관한 수많은 사유라는 것 정도는 안다.


일반적으로 '에로스'는 '에로', '에로틱'이라는 외설적이고 야한 것을 뜻하는 맥락으로 많이 활용되지만, 철학에서 에로스는 주체와 객체(타자)의 완전한 합일을 가리키고, 그러한 합일 과정에서 일어나는 궁극의 쾌락을 지칭할 때 동원된다. 예술에서 에로스가 주제로 사용되는 일이 많음도 그 때문일 수 있겠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그 사람과 나를 완전히 하나라고 여기거나, 상대방을 나(의 동일성-세계)에게로 완전히 흡수하고자 한다. 그래서 때로는 폭력적으로 폭발적으로 행동하고 감정을 쏟아낸다(이것이 데이트폭력의 핑계일 수는, 절대, 없다). 세계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홀로 자신이 설정한 사랑의 세계에 갇힌다. 그 세계에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이 함께 하기를 원한다. 상대방의 거절은 어두컴컴한 방 안에 홀로 갇히게 만든다(「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다만 에로스의 철학을 펼치는 주체는 남성이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 같다. 여성은, 페미니즘에서 타당하게 주장하듯이, 철학의 주체로서 객체인 남성을 설정하고, 그들이 추구하는 합일의 방식을 이야기할 수 없었다. 문학에서도 여성의 몸과 성을 소재로 삼는 문학은 비판적으로 읽히고는 했던 것 같다.


자신의 몸을 긍정하는 여성이 거북해 보였던 이유는 어쩌면 남성이 여성을 향해 던지는 시선이 여성의 육체를 향하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다시 말하면, 남성은 여성의 육체가, 내가 아닌 타인을(이성애 중심주의에서) 사랑함으로써 받아들일(심지어 쟁취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 마지막 종착지(보상, 목적)처럼 여겨졌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체슬러가 '여성의 적은 여성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세상 모든 남자는 늑대라고 말하는 존재도 '남자'였다).


대부분의 남성은 에로스의 면에서 장님이라고 융은 말한다. 즉 그들은 에로스와 성을 혼동하는 용서할 수 없는 오해를 일으킨다. 여성이 그와 성관계를 가지면 남성은 그 여성을 소유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는 결코 그녀를 소유할 수 없다. 여성에게는 오직 에로스적 관계만이 진정으로 결정적인 것이기 때문이다.(이부영, 『아니마와 아니무스』, 59면)


여성의 몸을 취하는 것이 사랑의 목적이 되어버린 남성이 있다면 그는 '여성'이라는 타자와 진정으로 관계 맺는 법을 모르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까. 여성의 가벼운 스킨십에 '설마 나를 좋아하나?'라고 착각하는 남자들의 모습은 어쩌면 신체적 접촉 자체가 사랑의 결과물인 것처럼 여기는 데서 비롯했는지도 모르겠다. 나이가 들어 아내가 스킨십을 하면 겁에 질려 도망가는 남성의 서사도, 어쩌면 그것이 '일', '노동'처럼 격하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아내와의 사랑은 철 지난 게임처럼, 이미 모든 미션을 클리어했다는 그런 느낌.


여성의 몸은 그들이 고이 지키다가 마지막에 허락하는 보상이 아니다. 따라서 내가 그녀의 신체를 모두 스쳤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내 사람이 아니다. 무신경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육체를 취하고 무신경할 수 있는 존재는 사냥감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성은 스스로 마음껏 움직이고 행동하여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갖거나 밀어낼 수 있는 수단으로 몸을 엄연히 가지고 있다. 내가 사랑하는 그녀가 당신의 손을 잡아 끈다면, 그건 이미 경험한 육체적 관계를 또 자는 의미가 아니라, 나와 당신이 서로만을 생각할 수 있는 둘만의 시공간에 존재하고 싶음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무아지경」, 「TV를 껐네...정도가 생각난다).


그러나, 융도 바르트도 그리고 나도, 결국 남성이라는 점, 여성이 꿈꾸는 사랑은 에로스적일 것이라는 판단조차도, 지나친 남성중심주의의 결과물임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와 마주한 타자(여성이든 남성이든)와의 진정한 '사랑'을 영원히 성취할 수 없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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