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아의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고-
부자유친(父子有親)과 부자유친(父子冇親) 사이에서 방황하던 나다. 그래서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눈에 띄었는지도 모른다.
제목을 보았을 때는 우리 시대 아버지의 인생을 담아낸 가족드라마 같은 소설일 줄 알았다. 제목에 빨간 별이 그려진 게 특별하다고 생각했지만, 책을 펼치기 전까지는 그 이유를 짐작하지 못했다. 초록색 표지에 빨간 별을 보았을 때, 그것이 인민군 군복에 가깝다고 생각했다면, 책을 대하는 태도가 조금은 달랐을지도 모르겠다.
별생각 없이 표지를 열고, 첫 장부터 바로 읽어나갔다. 작가의 말이나, 추천사 같은 것도 독자에게 권위로 작용할 수 있다는 생각에 잘 읽지 않는다. 이 책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읽어나가면서, 자꾸만 책날개로 넘어가 보았다. 주인공의 외모를 언급하는 부분에서는 작가의 사진을 보기 위해, 열 살이 되던 해를 언급하는 문장에서는 작가의 생년을 확인하기 위해, 박사학위와 시간강사라는 단어를 보고는 작가의 학력을 확인하기 위해 책날개로 돌아갔다. 소설 내용이 작가의 삶과 일치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소설 속 고아리와 작가의 생년이 일치하는 것을 확인하고, 작가의 전기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작품임을 거의 확신했다. 아니나 다를까, 책 마지막에 놓인 ‘작가의 말’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과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덤덤하게 풀어놓았다.
이런 소설을 대하면서, 내가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빨치산’이나 ‘빨갱이’를 여전히 입에 담는 우리 사회의 내적 모순을 비판해야 할까, 작품 속에 그려진 아버지의 모습으로 우리 사회의 가부장적인 모습을 비판해야 할까. 작가의 전기적 사실을 반영한 작품 앞에서 독자로서 나는 한없이 무기력해졌다. 실존했던 인물의 이야기를 실존하는 인물이 가공하여 들려주었기에 그럴 것이다.
친구인지 적인지 판단하기 힘든 인물들의 복잡한 사정들과 그 속에서 맞춰지는 고아리의 아버지 앞에서 나는 그저, ‘고아리와 나는 얼마나 닮았으며, 얼마나 다른가’를 물으면서 이 소설을 대했다.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발전한 경상도에서 자란, ‘불혹’을 맞았다고 축하(?)받았다가 39세로 강등된 ‘미혹’한 사내가, 이 소설로 자신과 아버지의 관계를 돌아본다는 게 가당키나 할까.
‘빨치산 아버지’와 ‘빨치산의 딸’
“용호야. 근데, 문재인이 정말 빨갱이가?”
공교롭게도 6·25에, 어머니가 나에게 물어보셨다. 어머니 주변에서 항상 하는 말이어서 댁에 갈 때마다 곧잘 묻곤 하셨다. 그날은 무슨 생각에선지, “응, 빨갱이 맞아요.”라고 답했다. 나의 대답에 어머니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진다. 나는 어떤 이유에서건 북한 사람을 불쌍하게 생각하고, 돕고 싶어 하고, 중국과의 관계를 걱정하고, 베트남 불법체류 노동자들의 인권을 걱정하고, 노조를 탄압하는 정부에 비판적인 사람은 빨갱이라고 말했다. 모두가 잘사는 좋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 가진 자들을 비판하고 가난한 자들을 응원하는 마음 전부를 말한다고. 가난한 사람에게 돈 몇 푼 주는 건 상관없지만,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되도록 도와주는 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 빨갱이가 된다고.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지금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빨갱이’, 그중에서도 ‘빨치산’이었던 아버지 고상욱 씨의 갑작스러운 죽음에서 시작한다.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모여드는 조문객을 마주하는 순간마다, ‘빨치산의 딸’인 고아리는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녀는 “내가 아는 아버지는 집안에서도 언제나 민중 운운하는, 너무 근엄해서 오히려 우스꽝스러운, 그러나 마음만은 아직도 지리산과 백운산을 날아다니는 혁명가였다.”라고 말한다. ‘빨치산’과 ‘빨갱이’라는 딱지가 평생 따라붙었던 삶이었음에도, 자신의 어릴 적 소중한 추억은 물론,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도 있는 고향에 돌아와 잘하지도 못하는 농사일을 하면서 여전히 이상적인 세상을 꿈꾸는, 패배한 혁명가의 모습이다. 좌절된 꿈 앞에서도 자신의 신념에 따라 진지하게 살아가는 태도가 그녀에게는 웃음거리로 보였다.
가정 바깥에서 바라보는 아버지는 이웃과 친척의 삶을 위기에 빠뜨리고, 딸에게 좌절을 안겨준 존재처럼 그려진다. “전직 빨치산이었던 내 아버지”, “사회주의자로서의 아버지”, “빼도 박도 못하게 사회주의자인 아버지”, “뼛속까지 사회주의자인 아버지”라는 표현들로 고아리는 아버지에게 빨치산과 빨갱이를 집요하게 각인한다. 사회가 아버지에게 씌운 굴레에서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자신의 아버지를 ‘빨치산’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빨치산 고상욱 씨는 혁명에 눈이 멀어 가족을 내팽개치는 사회주의자(빨갱이)가 아니었다. 이상적인 사회를 위해서 개인은 무조건 희생하라는 식의 이성적인 논리를 펼치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 무엇보다 사람(민중)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전근대적이라 할 만큼, 정(情)으로 똘똘 뭉친 모습이다. 이웃의 딱한 사정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오죽했으면’,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겠지’라는 말을 내뱉으며, 모든 사람에게 힘껏 정을 베푼다. 결코, 세련되지 않은 정을.
물론, 고상욱 씨의 이타심은 우리가 먹고 쓸 것도 없는데 다른 사람을 돕는다는 아내의 비판을 여러 차례 불러일으킨다. 이름 모를 민중을 재워주느라 딸에게 벼룩을 옮기고, 이런저런 거짓말로 빚도 갚지 않고, 도망가는 사람의 사정까지 이해하려고 하는 아버지를 보면서, 고아리는 그러한 문제들이 아버지가 ‘빨치산’이었기에 발생하는 것이라고 믿는 듯했다. 고상욱 씨는 자신을 비판하는 아내에게, 무엇을 위해 산속에서 그렇게 목숨을 걸었느냐며, 오히려 엄중한 질문을 던진다. 남편과 함께 산에서 투쟁했던 아내는 입을 다물었지만, 딸은 아버지가 아무래도 이해되지 않았다.
고상욱 씨는 분노하는 딸에게 “긍게 사램이제. 사람이니 실수를 하고, 사람이니 배신을 하고, 사람이니 살인도 하고 사람이니 용서도 한다”라고 말한다. 물론, 고아리는 아버지의 말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실수투성이인 인간이 싫”어서, “어지간하면 관계를 맺지 않았다.”라고 고백한다. “사람에게 늘 뒤통수 맞는 아버지를 보고 자란 탓인지도 몰랐다.”라는 핑계를 대면서.
고아리의 핑계는 인생 전반에서 아버지를 부정하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그녀는 경비 일을 하던 아버지가 젊은 사람에게 모진 일을 당하고 있는 상황을 목격했을 때, 나서서 도와주지 못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친자식도 아닌 학수는 그녀의 아버지가 얼굴을 다쳐 왔을 때, 경로당을 찾아가 의식적으로 분노한다. 노인 중 누군가가 때린 것이 아니라, 나무에 오르는 그녀의 아버지를 방관했기에 일어난 일임을 알고서도 격하게 분노를 표출했다. 노인들이 숨겨둔 자식일지도 모른다고 추측할 정도로, 자식인 고아리보다 더 ‘진짜 자식’처럼.
아마 고아리는 모르고 있었을 듯하다. 그녀는 아버지가 농사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참을성이 없다고, 어떻게 산에서 혁명가로 생활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지만, 화를 내는 사람 앞에서 진정하라고 거듭 말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오히려, 참아야 할 때를 아는 어진 인품의 소유자임을 증명한다. 참을성 없는 사람은 고아리 자신이었고, 참지 않아야 할 때 참을성을 발휘하는 비겁함도 아버지 고상욱 씨가 아닌 고아리 자신의 것이었다.
개인의 이익과 자유를 중시하고 개인의 성장이 사회 전체의 이익으로 자연히 돌아가리라고 약속한 사회는, 그렇게 믿었던 고아리에게 박사학위를 받고 여기저기 강의를 다니는 시간강사의 삶, 그 이상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산 저산 옮겨 다니면서 혁명을 꿈꾸던 ‘빨치산 아버지’와 이 대학 저 대학을 다니면서 강의하는 ‘빨치산의 딸’은 오묘하게 닮았다. 아버지와 딸 모두 저마다의 이상을 헤매고 다니는 게 아닐까.
노동자 아버지와 노동자의 아들
평생을 공장에서 주야간, 주말 특근과 잔업으로 일하면서 남는 시간에는 여기저기 일을 봐주시던 나의 아버지. 공장 소음 때문에 안 그래도 큰 목소리가 더욱 우악스럽게 변해버렸다는 아버지를 부정했던 나도, 아버지 덕에 박사학위를 받고 지방대학과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강의하며 먹고산다.
생각해 보면, 나의 아버지도 보기에 따라서는 ‘반쯤은 빨갱이’였던 것 같다. 역대 정권에서 거의 단 한 번도 배격당하지 않았던 경상도에서 나고 자라, 대기업 노동자로 정년을 채우고 퇴직하셨지만, 노조에 가입하고 그들의 투쟁을 지지했으니 그래도 반쯤은 빨갱이였던 것 같다.
어린 시절, 아버지 회사에서 제공하는 귀향 버스를 타고 명절마다 덕유산이 바라보이는 할머님댁에 갔다. 명절에 찾아오는 손님이 우리 가족뿐이어서 심심했던 기억이 많다. 큰아버지는 잘 보이지 않았다. 큰 집 형님들이 번갈아 큰아버지와 함께 오고는 했는데, 큰어머니까지 오는 경우는 정말 손에 꼽을 정도였다.
큰아버지와 아버지는 할머님댁에서 만나면 먹고사는 문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채소 장사를 하는 큰집에서는 큰아버지가 트럭으로, 큰어머니가 시장에서 채소를 팔았다. 아버지가 큰며느리가 내려오지 않으니 작은 며느리 혼자 고생한다는 듯한 소리를 하면, 큰아버지는 너희는 대기업이니까 매번 노사분규 일으켜서 돈 받아내고 명절에 쉬지, 우리는 아니라는 식으로 말했었다.
따지고 보면, 큰아버지가 먼저, 너희 회사에서 명절 떡값은 얼마나 주느냐는 식으로 이야기를 꺼내서 분위기를 망친 때가 많았다. 그렇지만 나이가 들수록 큰아버지의 생각이 더 맞는 듯 여겨졌다. 대학과 대학원에 다니면서 이른바 먹물을 채운 나도, 아버지는 대기업 노조 덕분에 다른 노동자와 달리 대접받았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그 노조 덕분에 학비 걱정 없이 공부한 건 까맣게 잊고, 아버지가 속한 노조를 비판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노조가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편 가르고 자신의 노조원만 챙긴다거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위한 투쟁에는 소극적이라는 비판이 주를 이루었던 것 같다. ‘빨치산 아버지’ 때문에 어그러진 혼사였지만, 딸의 혼사를 위해 땅을 팔고 남은 돈이, 자신의 서울살이 종잣돈이 되었음을 “그러고 보니 빨치산 부모 덕을 본 적도 있다”라고 깨닫는 고아리처럼 말이다.
스스로 머슴을 자처한 ‘빨치산 아버지’ 고상욱 씨처럼, 나의 아버지도 스스로 머슴이 되어, 여기저기 간섭하며 일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게 생활하신다. 양산과 울산, 부산을 오가면서 지인들과 친척들의 여러 일을 봐주신다. 할머님 생전에는 세 시간이 훌쩍 넘는 거리를 달려 할머님댁에 가서 망가진 지붕을 수리하거나, 부산에 있는 병원으로 모셔 드리고, 다시 울산 친척댁으로 모시고 오기도 했다. 그렇게 두루 다니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모두가 효자라고, 좋은 사람이라고 했다.
평생 ‘빨치산’, ‘빨갱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아버지의 어두운 그늘과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고아리처럼, 나도 평생을 노동자로 살았던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거친 말투와 세련되지 못한 행동,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모습에서 말이다.
그러나 나는 정작 무엇을 했는가.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을 대변하며 아버지에 맞서고, 아버지 세대의 투쟁이 자기들의 이익만 챙긴다고 생각한다고 비웃기만 했다. 아버지처럼 다른 사람을 위해 발 벗고 머슴 역할을 하지도 못했고, 아버지처럼 노조 같은 조직에 가입하여 간접적으로나마 누군가를 위한 작은 변화에 힘을 보태지도 못했다.
“어떤 딸인지, 어떤 딸이어야 하는지, 생각해보지 않았다”라는 고아리처럼, 나도 어떤 아들이고 어떤 아들이어야 하는지를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아버지로서 고상욱 씨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사회주의자·패배한 혁명가·유물론자’에만 집중하여 빨치산으로서 아버지를 비판했던 고아리와 나는, 크게 다를 바 없었다. 학수나 담배 친구였던 그 아이가 고상욱 씨에게 그랬던 것처럼, 고아리와 나는 ‘그저 그 사람’으로 아버지를 대하지 못했다.
아버지, 그냥 아버지
어린 고아리가 아버지의 나체를 마주하는 장면에서 ‘프로이트’를 목격할 수 있다. 이 땅의 수많은 고아리에게는 처음부터 없었고, 나를 포함한 이 땅의 수많은 아들에게는 행여 잃어버릴까 봐 겁이 났던 그것이, 인간 문명 전체를 유지하는 힘의 근거가 된다. 그것이 결핍된 존재이기에 따를 수밖에 없는, 그것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따를 수밖에 없는 힘으로서 ‘거대한 아버지’가 우리 사회에 존재하고 있다.
고아리는 ‘프로이트’를 따르고 있었다. 자신에게 없는 그것을 자신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으니까. 그러나 고아리의 아버지는 결국, 더욱 ‘거대한 아버지’에게 붙잡혔고, 다시는 자신의 세력을 확장할 수 없도록 거세당하고 말았다. 전기고문으로 인해 활동성을 잃은 ‘빨치산 아버지의 정자’는 이 세상에서 ‘거대한 아버지’를 거부하고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한의사가 지어준 약을 먹고 낳은, 하나뿐인 딸이 평생을 ‘빨치산 아버지’에게서 도망치려 했던 이유도, 아버지의 그것이 정작 나에게 주어지자 느껴졌던 거부감이었을 것이다. 닮고 싶어도 달랐던 아버지, 그리고 그 다름은 틀린 것임을 국가와 세상이 증명(각인)해 주었으므로, 아버지와 그녀는 닮았으나 닮아서는 안 되었으리라.
결국, 고상욱 씨는 우리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몰아내야(거세해야) 했던 두려움이 투사(投射)된 존재였다. 우리 사회가 흔들리지 않도록 동원해야 했던, 여전히 우리 사회가 끊임없이 호출하고 있는 절대부정의 존재. 대부분 세상을 떠났고, 살아있다고 한들 죽은 듯 살아갈 수밖에 없는, 어쩌다 자식을 낳았을 뿐 더는 후손을 낳을 수도 없는 그를, 우리는 얼마나 더 몰아세우려 하는 것인가.
‘빨치산 아버지’가 세상을 망쳐서 굴레를 씌운 것이 아니라, 모두가 망친 세상의 책임을 ‘빨치산 아버지’에게 덮어씌우고 그를 탓하기만 했던 것이 아닌가. ‘자신의 삶’과 ‘빨치산 형제와 부모의 삶’이라는 두 짐을 지기에는 유약했던 고아리와 그의 작은아버지는, 형이자 아버지인 고상욱 씨에게 책임을 물으며 자기 신세를 정당화하는 나약한 우리들의 화신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고상욱 씨는 가족 구성원으로서 져야 할 짐과 사회가 지워준 빨치산으로서 무거운 짐을 하나씩 하나씩 옮겨 놓으며, 그렇게 묵묵히 산 밑에서의 삶을 살아내고 있었다. 온 세상이 빨치산 고상욱의 세계라고 규정했던 ‘산’은, 그가 추구하던 진짜 세계가 아니었기 때문에, 빨치산 고상욱 씨에게 진정한 세계는 자신의 고향, 자신의 이웃과 가족들이 모여 사는 산 밑의 바로 그 세상이었기 때문이었다.
고작 4년을 산에서 지낸 삶으로 ‘빨갱이’라고 각인된 채, 평생 사회에 녹아들지 못하게 가로막힌 ‘빨치산 아버지’ 고상욱 씨. 비록 세상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이 빨갱이로 기억하며, 자기 사정의 책임을 묻는 상황 속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묵묵히 삶을 살아냈던 고상욱 씨는, 고아리에게는 “빨치산이 아닌, 빨갱이도 아닌, 나의 아버지”일 뿐이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삶의 흔적을 구석구석 찾아다니며 유골을 흩뿌리는 동안, 흩어져 있어서 제대로 마주하지 못했던 아버지를 비로소 온전히 모아 안을 수 있었다. 고아리의 아버지는 그렇게 해방되었다.
다행스러운 사실은, 고아리가 아버지의 죽음 이후에야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찾았다면, 나에게는 아직 아버지와 대면할 시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제 내가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쓸 시간이다. 얼마나 넉넉할지는 알 수 없다. 아무런 수식어도 없고 무거운 짐을 떠맡을 의무도 없는 자유로운 존재로서, 아버지를 온전히 받아들임으로써 놓아줄 수 있는, 그 시간이.
아내가 독후감 공모전이 있다고 말해줘서, 1주일 정도 부랴부랴 책을 읽고 글을 써 봤다.
입선 했다. 이렇게 쓰면 작품집에 실리지 않는구나 정도는 알려줄 수 있는 글인 듯하다.
작품집이 나왔기에, 실리지 못한 졸고도 공개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