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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눈

정정화의 『꽃눈』을 읽고

by 정선생

꽃눈



공원 동백나무 잎사귀 틈으로

메두사의 뱀이 눈 감고 있다

부디 겨우내 뜨지 말라는 간절한 바람

살금살금, 아차,

기어코 깨어있던 연분홍 눈동자

그 자리에 굳어버린다




겨울 공원에 꽃눈이 보인다. ‘피기/지기’ 사이에서 펼치는 눈치 게임. 그들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린다. ‘고백(告白)’과 ‘Go Back’의 사이, 실연(實戀)과 실연(失戀) 사이에서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 사이로 비치는 선홍빛. 참지 못하고 눈을 치켜뜬 녀석이 있다. 이미 시들어버린 녀석도 있다. 무척 조급했던 모양이다.


피고 지는 순간의 경계, 봄과 겨울 사이. ‘꽃눈’은 우리가 목격할 ‘새로운’ 가능성이지만, ‘소멸’의 기억(증거)이기도 하다. 수십 년 세월 동안 꽃이 피었음은, 그만큼의 꽃이 시들었음과 같기 때문이다. 또한 꽃눈은 같은 자리 같은 모습의 반복이 아니다. 그저, 삶(나무)의 거룩한 순환이다. 그래서 꽃눈은 가능성일 뿐, 확정된 미래는 아니다. 꽃으로 죽느냐, 꽃눈으로 죽느냐는 순전히 운명이요, 인연이다.


‘꽃눈’은 ‘삶’이면서 ‘사랑’이다. 정정화의 『꽃눈』은 꽃눈이 가득한 나무다. 정정화가 보여주는 꽃눈은 다채로운 ‘사랑(삶)’의 순간들이다. 꺼져가는 사랑을 붙들려는 사람, 피어나는 사랑을 기어코 외면하는(할 수밖에 없는) 사람, 피워낸 사랑과 피지 못한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는 사람 들이 보인다. 그들이 품고 있는 꽃눈이 보인다.

지고 있는 꽃을 향한 부정에서 지고 있는 꽃을 향한 인정(수용)으로 마무리하는 『꽃눈』은 적어도 나에게는 꽃을 향한 폭력적인 관점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피어있는 꽃만 꽃이라 인정하면서, ‘핀-진 꽃’, ‘피는-지는 꽃’ ‘필-질 꽃’, ‘피지-지지 못할 꽃’이 뒤엉킨 순간을 바라보지 못하는지도 모른다는 반성. 꽃을 향한 단 하나의 시선이 폭력을 낳는다. 피고 지는 모든 과정이 ‘꽃눈’에 들앉아있음을 인정하는 데서 꽃을 즐기는 더 나은 태도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꽃눈을 틔우기 위해 오히려 죽음으로 꽃을 내모는 실수를 수도 없이 목격하기에.


창문도 환풍기도 없는 공간에 가두어둔 채, 한 사람만을 바라보며, 영원히 지지 않고 피어있으라는 사랑의 요구는 그 자체로 폭력이다. 죽어가는 아내를 살리려는 몸부림이 어머니와 여동생에게 고통과 분노를 주고, 가부장적인 가치관이 한 사람(여성)의 인격을 무시하는 결혼(생활)을 가능케 만든다. 다른 이성과의 친밀한 관계는 모두 의심스러운 일이 되어 질투에서 집착으로, 집착에서 폭력으로 이행한다. 그리고 ‘이런’ 사랑에 신물 난 사람은 사랑 자체를 거부하며, 스스로 고통스럽게 만든다.


수많은 꽃눈이 매달린 나무가 있다. 어떤 꽃눈은 끝내 눈뜨지 못하고, 어떤 꽃눈은 일찍 뜬 만큼 일찍 죽고 만다. 대체로 때에 맞춰 눈을 뜨고, 때에 맞춰 시들기를 반복할 것이다. 우리는 그 대부분을 보면서 꽃의 피고 지는 일을 일반화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핀 순간과 진 순간만을 바라보며 꽃에 관해 이야기할 것이다.


많은 사람이 나고 자라 짝을 찾고 결혼하여 살다가 죽어간다. 그러나 우리는 ‘났다’ ‘자랐다’ ‘짝을 찾았다’ ‘결혼했다’ ‘살았다’ ‘죽었다’라는 개별적 사건에 주목할 뿐, 그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괄호’를 보지 못하는 게 아닐까. 삶의 결정적인 순간이 펼쳐질 찰나, 꽃눈, 그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누군가의 삶을 온전히 이야기할 수 없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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