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도된 추락, 조작된 사고, 그리고 목격자를 남긴 자
2017년 6월 19일, 새벽 03시 44분
강원도 S구역 외곽, 폐쇄된 보조 송전소 내부
루카는 추락 현장에서 곧장 서울로 향하지 않았다.
지령서에는 “보고 후 귀환”이라 적혀 있었지만, 그는 일부러 북서쪽으로 우회했다.
무인 송전소. 폐쇄된 지 12년째 되는 곳. 내부는 먼지와 금속 냄새로 가득했다.
루카는 현장 감식 가방을 꺼내며 안쪽 조명 하나를 켰다.
그 아래 펼쳐놓은 것들:
RJ-88A의 착륙예상점과 실제 충돌 좌표 비교 지도
기체 손상 지점 사진
인형 팔, 밀봉 상태
피묻은 풀잎을 밀봉한 슬라이드 유리
정리조 활동 직후 시간대의 열감지 흔적 캡쳐 이미지
그리고, 무엇보다 결정적인 것.
비인가 장비로 추출한 블랙박스 복제 로그.
그 파일 안엔, 공식 보고서에 없는 기록이 있었다.
22시 46분 17초.
“...아빠...?”
현장의 마이크가 포착한 아이의 목소리.
그리고 0.4초 뒤.
'감쇠 소음'이라 표기된, 아주 짧은 압축된 충격파.
루카는 이 구간을 반복 재생했다.
네 번, 다섯 번.
그때마다 무표정했던 그의 얼굴에, 미세한 흔들림이 번졌다.
“살아 있었다.
그런데 죽었다.”
2017년 6월 19일, 오전 08시 12분 / 서울 시내 외곽, 제3 비인가 청사
화이트팀 본부는 아무 이상 없는 듯 움직이고 있었다.
C1과 C2는 이미 다음 임무 대기 중이었고, C4는 새 장비 테스트 회의에 참석 중이었다.
그리고 중앙 데이터베이스엔,
루카의 귀환 기록이 아직도 '대기 중' 상태로 남아 있었다.
그의 실종이 문제되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
그는 정리조였고, 정리조는 본래 흔적 없이 움직이는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
2017년 6월 19일, 18시 05분 / 제주 모처, 루카 위장 거처 내
저녁 무렵.
루카는 겨우 도착했다.
그러나 쉬지 않았다. 곧바로 위장 서버를 열고, 자신이 만든 복제 파일을 정리했다.
그는 암호 수신용 태그 ‘P’를 호출했다.
그 신호는 12초 뒤 응답되었다.
화면엔 익숙한 얼굴이 떠올랐다.
“...핀.”
그녀는 3년 전 화이트팀 탈퇴 후, 완전히 사라졌던 인물이었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너, 아직 거기 있구나. 루카.”
“...그 아이가 살아 있었다.”
“알아.”
핀의 대답은 너무 빨랐다.
“지금 움직이는 팀들, 너한테 다시 추적자 붙일 거야.
너, 완전히 선을 넘은 거야.”
루카는 잠시 숨을 쉬었다.
그의 눈빛은 이미 되돌릴 수 없는 결심이 서 있었다.
“우린 너무 오래 속였어.
이제 그만해야 해.”
핀은 입을 다물었다.
한참 뒤, 마치 예전처럼 작전 회의를 시작하듯 말했다.
“추적 시작되면, 넌 어디로 가?”
“제주. 공항 근처, 민간 레이더소 부지.
거기서 RJ-88A 기체 잔해 일부가 빼돌려졌다는 첩보 있어.
정보는 조작됐지만, 실제는 다르다고 봐.”
“접선 암호는?”
루카가 입을 열었다.
“불완전 귀환.”
2017년 6월 20일, 00시 17분 / 화이트팀 SC-0 내장 시스템 – 로그 감지
비인가 접속 2건 탐지.
경로: 폐기된 외부 통신망 P-채널
접속자 추정: L, P (추정 전 요원)
등급: 알파 대응 필요
즉시 추적 요청됨.
2017년 6월 20일, 01시 03분 / 강원도 – 비밀 저장고 내부
검은 복장, 신분 불명 인물 2명.
그들은 회수된 RJ-88A의 실제 블랙박스를 감식하고 있었다.
공식 보고에 없는 ‘정본’ 파일이었다.
“...정리조가 하나 더 움직인 것 같다.”
“지시보다 먼저 움직였다고?”
“그래. 누군가, 그 아이를 봤다는 거야.
그리고 죽이지 않은 사람이 있어.”
그들은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루카.”
루카와 핀은 제주로 향한다.
그러나 이미 화이트팀은 ‘L’과 ‘P’를 추적하고 있었고,
RJ-88A의 실물 블랙박스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2017년 6월 20일, 오전 09시 40분
제주 국제공항 근처, 민간 해양관측 레이더 부지 (폐쇄된 4번 창고)
루카는 트럭에서 내렸다.
회색 천막이 드리운 입구.
부식된 철제 문 너머로 해풍이 스치고 있었다.
공항에서 멀지 않은 이곳은,
10여 년 전까진 해안 감시용 레이더 기지로 쓰였지만
지금은 관할 없는 사각지대였다.
그가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문이 먼저 열렸다.
핀.
그녀는 루카보다 먼저 도착해 있었다.
검은 점퍼 차림, 수신기 하나를 손에 들고 있었다.
“예상보다 빨랐네.”
“네가 좌표를 이상하게 보내니까.”
둘은 서로 짧은 시선만 주고받은 채, 대화 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내부는 반쯤 붕괴된 장비와 파편들로 가득했다.
그러나 벽 쪽, 콘크리트 틈 아래로 깊게 내려가는 철제 사다리가 드러나 있었다.
루카가 입을 열었다.
“사고 이틀 뒤, 모처에서 ‘민간 수거팀’이 도착했다고 해.
공식 기록엔 없는데, 정비창 부품 몇 개가 이쪽으로 옮겨졌어.”
핀은 이미 열어둔 데이터 모듈을 열었다.
그 안엔, RJ-88A의 우측 날개 파편이 실제 이곳으로 수송된 경로가 표시돼 있었다.
“블랙박스가 조작됐단 건 우리 둘 다 아는데...
원본이 여기에 있을 가능성은?”
루카는 단호하게 말했다.
“확률이 아니라, 확신이야.
우리가 봤던 블랙박스는 ‘복제 파일’이야.
정작 정본은, 따로 숨겼어. 이 안에.”
핀은 조용히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들어가자.”
2017년 6월 20일, 오전 10시 12분
4번 창고 지하 저장소 – 접근 성공
사다리를 따라 지하로 15m.
콘크리트 벽면을 따라 불빛 하나.
그리고 무너진 벽 틈 속, 노출된 검은 케이스.
“...이거.”
핀은 케이스를 집어 들었다.
표면에 번진 기름 자국, 그리고 격납 기록 스티커.
‘RJ88A-WB01’
화이트박스. 블랙박스와는 별개로,
내부 보안 감시용으로만 쓰이는 극비 기록 장치.
“기체 내부에서도 모르게 설치된 거야.”
루카가 말을 이었다.
“화이트팀이 작전 중 사용하는 감시용 모듈.
우리가 몰랐던 게 아니라, 우리가 쓰였던 거야.”
핀은 케이스를 열었다.
그 안엔 작은 저장 디스크.
디코딩 포트는 폐기된 구형 인터페이스였다.
“이건 바로 못 연다.
복호화 장비는... 아마 지금, 화이트팀도 못 갖고 있을 걸.”
루카는 가방을 열고 낡은 휴대용 복원장비를 꺼냈다.
“이걸로는 전부 못 보지만,
시작 30초 정도는 풀 수 있어.”
그는 케이블을 연결했다.
그리고, 화면에 첫 장면이 떠올랐다.
RJ-88A 내부 감시기록 – 화이트박스 시퀀스 #01
[녹화: 2017-06-18 / 22:41:55]
카메라는 후방 화물칸을 비추고 있었다.
그 안엔 인물 하나.
검은 복장의 남성.
화이트팀 요원 C2.
그는 기체가 추락하기 전,
이미 화물칸에 숨어 있었다.
그는 무언가를 설치하고 있었다.
무전 장치, 방향 유도장치, 그리고
작은 신호 송신기.
루카는 주먹을 꽉 쥐었다.
“...탑승 전에 이미 들어가 있었어.
이건 사고가 아니라,
아예 출발 전부터 ‘구조 자체가 설계된 제거’였어.”
핀은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럼... 아이는?”
장면이 바뀌었다.
아이의 손이, 좌석 뒤로 떨어진 인형을 향해 뻗어간다.
그리고 그보다 앞서, 복도 끝에 누군가가 총을 겨눈다.
하지만 그 손은 잠깐 멈춘다.
총이 발사되지 않는다.
루카가 화면을 멈췄다.
“멈췄다고?”
“쐈다고 보고됐잖아.”
핀은 중얼였다.
“...누가, 아이를 살려뒀던 거야.”
“그런데... 보고에는 죽은 걸로 돼 있어.”
루카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럼 아직 살아 있을 수도 있어.”
“아이?”
“그래. 누군가, 이 아이를 빼돌린 거야.
그 흔적을 지운 사람은, 아마 우리와 같은 정리조 출신일 가능성도 있어.”
2017년 6월 20일, 11시 03분 / 화이트팀 SC-0 비인가 작전실
“L과 P가 접선했다.”
“기록 복제 추적됨. RJ-88A – 화이트박스 접근 감지.”
“...그럼 정본을 가진 건 그들이다.”
한 남자가 조용히 말했다.
“3단계 추적 프로토콜 가동.
그리고 루카, 그를 제거하지 마.
그를 미끼로 써.
우린 이제 진짜 표적을 알게 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