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시 아래, 진실 위에

질문은 허락되지 않는다. 기록은 숨겨졌고, 감시는 시작됐다.

by 피터팬


2017년 6월 8일

서울 모처, 청사 외곽 5지구 폐기된 통신 벙커 – SC-0 구역.


루카는 언제나처럼

지정된 복장, 구두,

태그 없는 검은 신분증을 착용했다.


그가 사용하는 차량은

렌트도 아니고 국방부 소속도 아닌,

등록조차 안 된 회색 SUV였다.


그는 오늘,

보고가 아니라

질문을 하러 왔다.


금속 게이트 두 번,

지하 계단 열두 개,

정전식 스캔 세 번을 지나 도착한 방.


기압이 귀를 누르고,

공기는 희미한 소독약 냄새로 뒤덮였다.


방 안엔 한 사람이 있었다.

아니, 사람 같은 형체.


그는 이름이 없었다.

화이트라인 소속,

오직 ‘위치 01’로만 불리는 남자.


자세히 보려 하면

시선이 자꾸 미끄러졌다.


얼굴조차 어딘가 익숙하지만

기억나지 않는

그런 종류의 존재.


“시나리오 4-A, 만족스럽다.

당신 팀은 기대 이상이었어.”


루카는

자리 끝에 서서 정자세로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보고 외에 확인받고 싶은 게 있어...

오늘 요청했습니다.”


화이트라인은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질문?”


“계획에 없던 문서 회수.

그 내용은

단순한 이동기록과 메모뿐이었습니다.


파기하란 명령이 있었지만,

하나 묻겠습니다.”


“말해보지.”


루카는 잠시 숨을 고르고 입을 열었다.


“만약...

그 기록이 사라지지 않고 유출됐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진행해온

모든 ‘은폐’의 정당성은...

유지될 수 있습니까?”


그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었다.

불안이었다.


그는 안다. 현장은 깔끔하게 마무리됐고,

공식 보고서엔 박연수라는 이름조차 흐릿하다.


하지만

그 남자가 남긴 메모 한 장은,


분명히

계획 바깥의 증거였다.


대신,

잠시 시선을 거두고

조용히 말했다.


“질문에 답은 없습니까?”


화이트라인은

서류를 가볍게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우리는 진실을 없애지 않아.

다만,

진실이 필요 없는 세계를 만드는 것뿐이지.”


“그걸 누가 결정합니까.”


“그걸 네가 묻는 순간,

넌 화이트팀이 아니게 돼.”


정적이 흘렀다.


루카는 말없이 일어나

서류를 챙겼다.


나가는 문 앞에서,

그는 잠시 돌아보았다.


“기록은,

아직 제게 있습니다.”


화이트라인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알고 있다.

그리고 우린 지켜본다.”


문이 닫혔다.

방 안엔 다시

소독약 냄새와 침묵만이 남았다.




2017년 6월 8일, 23시 47분.

서울 서부, 비인가 주거지 6층.


문을 열자

곰팡이 냄새가 퍼졌다.

형광등은 잠깐 켜졌다가

다시 꺼졌고,


창문은 접착식 단열 필름으로 봉인되어 있었다.


이곳은 거주지가 아니었다.

기록상 존재하지 않는 방.


루카는 손목시계에서

배터리를 분리하고,


주머니 속 디지털 키를

철제 파이프 사이에 밀어 넣었다.


한쪽 벽면을 눌렀다.


미세한 진동과 함께

콘크리트 패널이 미끄러지며


뒤편 공간이 열렸다.


안쪽엔

철제 캐비닛 하나와 낡은 방탄가방.

그리고

열에 타지 않는 파란색 비닐 봉투가 놓여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봉투를 꺼냈다.


내용물은

반으로 찢긴 메모,


그리고 진동 횟수, 차량 시간,

실험 구역 코드가 적힌 작은 수첩.


그는 그것들을

가방 안쪽, 비밀 이중 포켓에 밀어 넣었다.


“우린 진실을 없애지 않아...?”

“진실이 필요 없는 세계를 만드는 것뿐...”


그 말이 머릿속에서 반복됐다.

그건 대답이 아니었다.


그것은 경고였다.


잠시 후,

루카는 다시 문을 닫고

벽을 원위치시켰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방을 빠져나갔다


하지만

모든 것이 지켜지고 있었다.


같은 시각, 건물 옥상.

디에고 시점.


디에고는

망원경을 접고, 자동기록 장치를 껐다.


열화상 스캔은

루카의 움직임을 벽 너머까지 분석해냈고,


철제 구조 안에

비정상적인 중량 변화가 감지되었다.


“이중 격실.

내부 금속 반응 있음.

비밀 보관구조 추정.”


그는 이미

여러 차례 루카를 추적해왔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루카가 ‘불태우지 않았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디에고는 조용히 옥상에서 내려왔다.


계단은 밟지 않고

난간을 타고 움직였고,


소음은 전혀 없었다.


그의 통신기엔

특수 인가 채널이 자동 접속됐다.


화이트 내부검열국 – 감시 코드 GRAY-04


“S-3 루카,

비인가 기록물 보관 확인됨.


보고 전, 감시 지속.

감정적 반응 여부 추적 중.”


디에고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에겐 루카는 ‘동료’가 아니었다.


그는 단지,

작동 정지 직전의 톱니바퀴 하나일 뿐이었다.


그가 중얼거렸다.


“너는 지금,

시스템의 바깥을 본 거야.

그다음은... 선택이 아니야.”


그날 밤,

루카는 몰랐다.


그가 걸어가는 길 위에는

이미 또 하나의

작전 시나리오가 쓰이고 있다는 걸.



“우린 진실을 없애지 않아. 진실이 필요 없는 세계를 만들 뿐이지.”
하지만 그날, 누군가는 처음으로 '기억'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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