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에 드러난 낯선 얼굴
제주 한경면 용수리.
숙소 창 너머로 바다가 보였다.
해가 수평선 쪽으로 기울며 하늘은 붉게, 주황빛으로 물들었다.
그 빛이 바다 위로 길게 번지며, 파도마다 부서져 반짝였다.
서쪽 노을은 유난히 강렬했다.
붉음이 퍼져나가다 어느 순간 보랏빛으로 물들며,
바닷가 공기까지 색칠하는 것 같았다.
짭조름한 바람이 창틈을 파고들어왔다.
나는 갑자기 몸이 근질거렸다.
“이 길을 달리면서 노을을 보고 싶다.”
말도 안 되게 들떴다.
마치 어릴 적 소풍 전날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운동화 끈을 질끈 묶었다.
발끝이 가볍게 튀었고,
심장이 달릴 준비를 먼저 해버린 듯 뛰었다.
해안도로에 나서자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바닷바람 속에는 짠내와 함께 오래된 해초 냄새가 섞여 있었다.
머리카락 사이로 스며드는 그 냄새가, 묘하게 설레게 했다.
나는 발걸음을 떼었다.
아스팔트를 두드리는 내 발소리와
파도 부서지는 소리가 어우러졌다.
리듬을 타듯 속도가 붙었다.
숨은 점점 가빠졌지만,
마음은 한없이 가벼워졌다.
노을빛이 내 옆을 달리며
그림자처럼 따라왔다.
길은 고요했다.
문 닫은 가게들이 줄줄이 이어졌고,
간판은 녹슬어 글씨가 반쯤 지워져 있었다.
바닷바람에 삐걱대는 소리가 허공에 가볍게 섞였다.
사람은 커녕 차 한 대도 지나지 않았다.
적막했지만,
그 적막조차 노을의 색감 속에서는
기묘하게 평화로웠다.
그러다.
도로 옆으로 낡은 건물이 하나 보였다.
간판에는 희미하게 ‘유성횟집’이라고 적혀 있었다.
문은 닫혀 있었고,
유리창은 소금기와 비에 얼룩져 뿌옇게 변해 있었다.
그 건물을 스쳐 지나던 순간이었다.
창에 내 모습이 비쳤다.
달리고 있는 나.
너무 당연한 일이었는데도,
순간 발걸음이 흔들렸다.
너무 빨리 지나쳐,
제대로 본 게 맞나 싶었다.
“내가 맞나?”
잠깐 스친 의문은 곧 파도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달리기를 이어갔다.
노을은 점점 더 짙게 물들고 있었다.
붉음은 보랏빛으로 넘어갔고,
바다는 어두운 비늘처럼 빛을 깔아앉히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가 달리는 길만 더 빨리 어두워졌다.
마치 그림자가 서둘러 내려앉는 듯,
발밑이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았다.
가슴이 묘하게 조여왔다.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발길을 돌렸을 때,
다시 그 건물을 스쳐 지나게 되었다.
낡은 간판, 굳게 닫힌 철문,
그리고 바닷바람에 닳아 뿌옇게 변한 유리창.
나는 본능처럼 창을 바라봤다.
그리고
숨이 멎었다.
창 속에 달리는 건 분명 ‘나’였다.
하지만 동시에, 내가 아니었다.
내 얼굴은 땀에 젖어 일그러져 있었는데,
유리창에 반사된 얼굴은 씩 웃고 있었다.
입꼬리가 노을빛에 번져,
비정상적으로 길게 찢어져 올라가 있었다.
눈빛은 내가 가진 적 없는,
낯선 표정이었다.
게다가 발걸음은 나보다 반 박자 더 빨랐다.
앞질러 가며, 끌고 가듯 달리고 있었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불과 1초도 안 되는 눈길.
그러나 그 순간은
끝없이 늘어진 것처럼 내 몸이 얼어버렸다.
나는 그대로 유리창에서 눈을 떼고,
죽을 힘으로 숙소를 향해 달렸다.
바람은 얼굴을 찢듯 스쳤고,
노을빛은 점점 뒤로 사라졌다.
뒤를 돌아보면 그대로 따라올 것 같았다.
그래서 오직 앞만 바라보며 달릴 수밖에 없었다.
숙소 문을 닫고 들어왔을 때,
심장은 미친 듯이 요동쳤다.
하지만 눈을 감아도,
머릿속엔 여전히 그 얼굴이 각인되어 있었다.
내가 아닌 나.
소금기와 얼룩진 유리창 너머에서 웃고 있던,
붉은 노을빛 속의 그림자.
그게 무엇이었는지는
끝내 알 수 없었다.
다만 분명한 건,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다시 공포로 굳어버린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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