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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서의 품격

글 한 줄에도 스타일이 있다

by 피터팬


사직서는 참 묘하다.


짧게 쓰면 성의 없어 보이고,

길게 쓰면 괜히 구차하다.


퇴사를 결심한 밤,

나는 몇 번이나 화면을 켰다 껐다 했다.


“뭐라고 써야 하지?”


사직서라는 건 평생 몇 번 쓰지도 않을 글인데,

막상 쓰려니 이 한 장에

내 시간이 다 담기는 것 같았다.


구구절절한 이유는 필요 없다


처음엔 이런 문장을 적었다.


“팀 내 업무 분장 문제로 인한 불만족과 개인적인 진로 고민으로...”


쓰다 보니 마치 하소연 같았다.

‘이건 아닌데...’ 싶었다.


또 한 번은 이렇게 써 내려갔다.


“회사의 성장 방향과 제 가치관이 맞지 않아...”


이건 마치 면접 자리에서 하는

모범 답안 같았다.


그럴싸하지만, 정작 내 마음은

하나도 담기지 않은 문장.


결국 다 지우고 남긴 건 단 두 줄이었다.


“본인은 O월 O일부로 사직하고자 합니다.

그동안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짧았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원망은 입으로 풀면 되지,

글에 새겨둘 필요는 없었다.


감사는 형식이 아니라 품격이다


사직서에 감사 문구를 꼭 써야 하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억울한데 왜 고맙다고 해야 하죠?”


그럴 때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고맙다는 말은

회사를 위한 게 아니라,

당신을 위한 겁니다.”


감사의 문장은 회사에 면죄부를 주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내 선택을 깔끔하게 만들고,

내가 후회 없이 떠날 수 있도록 돕는 장치다.


그 한 줄이 나를 더 단정하게 만들어준다.


뒤끝 없는 사람으로 기억되길 원한다면,

결국 마지막 글은

감사의 언어로 닫는 게 맞다.


기록은 오래 남는다


발표는 공기처럼 흩어진다.


그러나 사직서는 기록으로 남는다.


몇 년 뒤, 인사팀 서랍에서 꺼내 본다 해도

내 이름 옆에 적힌 문장은

여전히 나를 대신할 것이다.


그리고 떠난 회사에서

다시 누군가가 내 이름을 언급할 때,


내가 남긴 사직서 한 줄은

의외로 강력한 증거가 된다.


깔끔한 글을 남긴 사람은

깔끔한 태도를 가진 사람으로 기억되고,


감정이 묻은 글을 남긴 사람은

그 감정으로만 요약된다.


그렇다면 어떤 문장이

오래 남아도 괜찮을까?


바로 군더더기 없는, 단정한 글이다.


사직서는 종이 한 장이지만,

그 안에는 내가 어떤 태도로

회사를 떠나는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래서 사직서는 마지막 보고서이자,

나 스스로를 향한 짧은 다짐이기도 하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사직서는 퇴사의 끝이 아니라,

내 새로운 시작을 가장 단정하게 열어주는

첫 문장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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