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한 줄에도 스타일이 있다
사직서는 참 묘하다.
짧게 쓰면 성의 없어 보이고,
길게 쓰면 괜히 구차하다.
퇴사를 결심한 밤,
나는 몇 번이나 화면을 켰다 껐다 했다.
“뭐라고 써야 하지?”
사직서라는 건 평생 몇 번 쓰지도 않을 글인데,
막상 쓰려니 이 한 장에
내 시간이 다 담기는 것 같았다.
구구절절한 이유는 필요 없다
처음엔 이런 문장을 적었다.
“팀 내 업무 분장 문제로 인한 불만족과 개인적인 진로 고민으로...”
쓰다 보니 마치 하소연 같았다.
‘이건 아닌데...’ 싶었다.
또 한 번은 이렇게 써 내려갔다.
“회사의 성장 방향과 제 가치관이 맞지 않아...”
이건 마치 면접 자리에서 하는
모범 답안 같았다.
그럴싸하지만, 정작 내 마음은
하나도 담기지 않은 문장.
결국 다 지우고 남긴 건 단 두 줄이었다.
“본인은 O월 O일부로 사직하고자 합니다.
그동안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짧았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원망은 입으로 풀면 되지,
글에 새겨둘 필요는 없었다.
감사는 형식이 아니라 품격이다
사직서에 감사 문구를 꼭 써야 하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억울한데 왜 고맙다고 해야 하죠?”
그럴 때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고맙다는 말은
회사를 위한 게 아니라,
당신을 위한 겁니다.”
감사의 문장은 회사에 면죄부를 주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내 선택을 깔끔하게 만들고,
내가 후회 없이 떠날 수 있도록 돕는 장치다.
그 한 줄이 나를 더 단정하게 만들어준다.
뒤끝 없는 사람으로 기억되길 원한다면,
결국 마지막 글은
감사의 언어로 닫는 게 맞다.
기록은 오래 남는다
발표는 공기처럼 흩어진다.
그러나 사직서는 기록으로 남는다.
몇 년 뒤, 인사팀 서랍에서 꺼내 본다 해도
내 이름 옆에 적힌 문장은
여전히 나를 대신할 것이다.
그리고 떠난 회사에서
다시 누군가가 내 이름을 언급할 때,
내가 남긴 사직서 한 줄은
의외로 강력한 증거가 된다.
깔끔한 글을 남긴 사람은
깔끔한 태도를 가진 사람으로 기억되고,
감정이 묻은 글을 남긴 사람은
그 감정으로만 요약된다.
그렇다면 어떤 문장이
오래 남아도 괜찮을까?
바로 군더더기 없는, 단정한 글이다.
사직서는 종이 한 장이지만,
그 안에는 내가 어떤 태도로
회사를 떠나는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래서 사직서는 마지막 보고서이자,
나 스스로를 향한 짧은 다짐이기도 하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사직서는 퇴사의 끝이 아니라,
내 새로운 시작을 가장 단정하게 열어주는
첫 문장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