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페이지는 늘, 읽는 사람이 완성한다.
소녀는 비가 오던 어느 저녁,
마을 끝 언덕 위에 있는 오래된 도서관을 찾았다.
언제부터 있었는지조차 모를 만큼 낡은 건물은
창문마다 희미한 빛만 새어 나오고 있었고,
문을 밀자 먼지 냄새와 오래된 종이향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도서관은 이상할 만큼 조용했다.
소녀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사람 키보다 높은 책장들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책들이 아주 작게 숨을 들이쉬는 듯했다.
그러다 소녀는
가장 안쪽, 누구도 찾지 않을 것 같은
낡은 사다리 옆에서
먼지가 두껍게 내려앉은 책 한 권을 발견했다.
표지에는 제목이 이렇게 적혀 있었다.
<마지막 이야기>
이상하게도, 이 책만은
오래된 먼지를 뒤집어썼는데도
마치 누가 방금 놓고 간 듯
손 모양이 은근히 느껴졌다.
소녀는 자리에 앉아
조심스럽게 책을 펼쳤다.
그 순간,
책 속에서 무언가가 반짝였다.
첫 장엔
소녀가 처음 인형극장을 보던 날이 그려져 있었다.
줄도 없이 움직이던 인형들,
밤마다 켜지던 작은 불빛,
눈물을 흘리지 못하던 인형들...
두 번째 장엔
사라진 그림자를 찾으러 나섰던 밤이 있었다.
고요한 숲,
그림자들이 쉬고 있던 어둠,
그날 소녀가 느꼈던 묘한 따뜻함까지.
세 번째, 네 번째, 그 다음 장에도
소녀가 겪어온 모든 일들이
꼭 누군가 옆에서 보고 그린 것처럼
정확하게 펼쳐져 있었다.
소녀는 숨을 멈춘 채
한 장, 또 한 장 넘겼다.
기쁠 때의 자신,
두려웠던 순간의 자신,
헤매던 밤,
다시 일어서던 날까지.
모두 그 안에 있었다.
그러다 소녀는
마지막 장 앞에서 멈췄다.
그 페이지는
완전히 텅 비어 있었다.
글자도, 그림도, 작은 흔적조차 없었다.
마치 아직 쓰여지지 않은 이야기처럼.
소녀는 잠시 머뭇거리다
빈 페이지 위에 조용히 손을 올렸다.
손끝이 종이를 스치는 순간,
책은 아주 작은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하얀 페이지 위에
서늘하고도 따뜻한 빛의 글씨가
천천히 적히기 시작했다.
“당신이 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었습니다.”
글씨는 소녀의 손끝에서 시작된 듯했지만
그 필체는 소녀의 것이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이 순간을 기다린 누군가가
천천히, 아주 부드럽게 쓰고 있는 듯한 느낌.
글이 완성되자
책은 조용한 소리와 함께
스스로 덮였다.
탁.
아주 작고 부드러운 소리.
소녀는 책을 무릎 위에 두고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이 책은 대체 언제부터 있었던 걸까.
누가 기록한 걸까.
왜 자신만 발견할 수 있었던 걸까.
하지만 소녀는 곧 깨달았다.
이 책은 다른 누구의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나온 모든 밤과 마음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기록이라는 것을.
외롭던 날,
두렵던 날,
무언가를 마주할 용기가 필요했던 날
그 모든 마음의 조각들이
한 권의 책이 되어
자신 앞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소녀는 조용히 책을 가슴에 안았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고마워.”
도서관 밖으로 나왔을 때
비는 이미 그쳐 있었고,
오래 기다린 듯한 작은 별 하나가
하늘 높은 곳에 떠 있었다.
소녀는 언덕길을 천천히 내려가며
마지막 페이지에 적힌 문장을 다시 떠올렸다.
“당신이 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마지막 페이지를 완성하는 사람은
소녀 자신이라는 사실을
조용히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