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치집에서 당한 창피

- 그럴 수는 없었다

by Cha향기

내가 교회를 다녔던 이유는 그냥 교회가 좋았기 때문이다. 고2 때, 학급의 친구들 중에서 2/3 정도는 우리 교회에 다녔다. 어떤 친구에게라도, “우리 교회에 한번 가볼래?”라고 하면 자석에 끌린 듯이 그들은 교회에 왔다.


그리고 가족들에게도 교회에 다니자고 말했다. 지금 독일에서 선교사로 사역하는 막내 남동생이 중학생이었을 때다. 교회에 한 번 가보자는 내 말에 꼬치꼬치 따지고 들어서 궁지에 몰릴 지경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 그 동생이 교회에 다니고 있었다. 대학을 마친 후에 신학 대학원을 졸업하여 마침내 목사가 되었고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여고에 다닐 때, 고향에 갔다가 우연히 여동생의 일기장을 본 적이 있다. 극단적인 선택을 암시하는 글이 적혀 있었다. 두려웠다. 나는 마음을 진정하고, 내가 믿고 있던 하나님에 관해 적고 동생도 교회에 다니라는 말을 그 일기장에다 빽빽이 적었다. 그것을 읽은 동생은 교회에 갔고 지금까지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나의 부모님만은 절대로 믿지 않을 것 같았다. 오빠도 마찬가지일 것이 뻔했다. 왜냐하면 오빠도 내가 교회에 다니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내게 싫은 소리를 하곤 했기 때문이다.

오빠가 대학생이었을 때다. 한 번은 하나님에 관해 진지하게 오빠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오빠도 교회에 다니겠다고 했다. 당시에 오빠는 음악에 빠져 살다시피 했었다. 그런데 자신이 소지하고 있던 몇 상자 분의 카세트테이프를 모두 내다 버렸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했다. 오빠는 교회에 다니게 되면서부터 곧바로 성가대 지휘를 맡았다.


오빠가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는 사실을 부모님이 알게 되면서부터 핍박의 수위가 달라졌다.

어느 날 밤이었다. 어머니는 거의 살기가 돌 정도의 음성으로 노발대발하기 시작했다.

“니 죽고 나 죽자. 부모가 그렇게 싫다고 하는 교회는 왜 다니노? 교회가 밥을 먹여주나 떡을 주나? 오늘은 담판을 지어야 하겠다. 니만 다니는 것도 눈꼴사나워서 못 봐주고 있는데 종손인 오빠까지 교회로 데려가면 우리가 조상을 어떻게 보노?”

그러면서 어머니는 이불속에서 식칼을 꺼내 들었다. 나는 그 순간 기절할 것처럼 무서웠다. 바로 그때, 같은 마을에 사시는 분이 밤마실을 왔다.

“이 집은 조용하네. 뭐하노?”라며 그분이 대문을 열고 들어왔다.

‘조용하다니요? 지금 세상이 무너질 정도로 무섭고 천둥보다 큰 소리가 나고 있었는데요? 흑흑’라고 중얼거리며,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어느 날, 울산에 사는 큰 이모 댁에 잔치가 있었다. 대학에 다니던 오빠와 나는 함께 울산에 갔다. 모든 친인척이 다 모인 듯했다. 잔치가 끝이 났지만, 그 시절에는 결혼식이 끝나면 혼주 댁에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며 지내는 풍습이 있었다. 모든 친척이 가득 모인 잔칫집에서 아버지가 큰소리로 말씀했다.

“야, 니 당장 말해라. 예수냐? 부모냐? 부모가 그렇게 싫다고 하는 교회를 왜 다니냐?”

아버지는 화를 내다가 울기까지 하셨다. 그 자리에 있던 친척들이 한 마디씩 했다.

“키워서 대학까지 보내 놓으니 부모를 거역하네 ”

“다시는 교회에 안 다니겠다고 한마디만 해라”

“저렇게 말하는 아버지 심정도 모르냐?”


아,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차라리 죽을지언정 교회에 다니지 않겠다는 말은 하지 말자.’라고 마음을 먹었다.

어라? 오빠는 또 다른 친척 집에서 나와 똑같은 상황을 당했던 모양이었다. 오빠는 울어서 눈이 부어있었다. 오빠는 아버지의 눈물에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앞으로 예수를 믿지 않겠습니다. 교회에 다니지 않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렇게 말했다고 했다. 돌아오는 고속버스에서 오빠에게 말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났어. 마음은 아팠지만, 교회에 다니지 않겠다고는 말하지 않았어.”

“아~ 그런 말씀이 있었구나.” 저녁노을이 버스 창가에 비치던 날, 오빠의 일그러지던 표정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 일 이후에 오빠는 입대했고 제대 후에 잠시 교회를 다니긴 했으나 지금까지 40여 년간 교회에 다니지 않고 있다.


아버지가 또 한 번 화를 낸 적이 있다. 그것은 등록금 고지서에 적힌 문구 때문이었다. 당시에 대학은 계열별 모집이어서 나는 '문계열'로 입학을 했었다. 그 말을 줄여서 고지서에 '교인'이라고 적었던 것이다.

"교인이라는 걸 대학교에서 어떻게 아노? 부끄럽지도 않나? 예수쟁이?" 설명할 겨를도 없이 등록금 고지서는 갈갈이 찢어졌다.


'교회', '예수'라는 말만 들어도 화부터 내던 아버지는 내가 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말기암 진단을 받았다. 병원에서는 이미 수술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래서 아버지께, "자연계에 자연법칙이 있듯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도 영적인 원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버지를 사랑하시며, 아버지를 위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라고 벌벌 떨면서 아버지께 하나님에 대해 말해 보았다. 정말 무서웠다. 당장 뺨이라도 맞을 것 같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런데 아버지는,

"계속해봐라."라고 하셨다. 나는 귀를 의심했다. 아버지가 그런 말을 할 분이 절대로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영접기도를 하게 인도했었다. 아버지는 순한 양처럼 영접기도를 따라 했다. 그때까지 보았던 아버지의 모습 중에서 가장 약해 보였다. 그 이튿날 새벽에, 아버지가 운명하셨다. 그 순간에 나는 우는 대신에,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라는 찬양을 불렀다.

https://www.youtube.com/watch?v=TEEwEEz6xH0


어머니는 막내아들이 목사가 되어 교회를 개척하니 손주를 돌보려고 잠시 함께 살았다. 자연스럽게 아들이 시무하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찬송은, '복의 근원 강림하사 찬송하게 하소서'라는 것이다. 기억력이 유난히 좋은 어머니는 이 찬송가의 가사를 완벽하게 외우신다. 반주도 없이 음정, 박자 다 무시하고 단 번에 4절까지 부르신다.

https://www.youtube.com/watch?v=I-BjPHGRCcw


이 글을 적고 있는데 또 한장의 멋진 캘리 그래피 작품이 도착했다. 참 위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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