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모(大母)'라는 별칭

- 충성과 헌신의 날들

by Cha향기

집을 떠나서 여고에 다니게 되면서부터 잠시 교회에 다니지 않았다. 그러다가 여고 2학년 때부터 다시 다니게 된 교회는 '학생회'라는 것이 있었다. 방과 후에는 습관처럼 기도회 참석하는 명목으로 교회에 갔다. 교회 일에만 열중했었다. 학생회 여부회장을 맡아서 이런저런 일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교회에 다니는 것을 싫어하신 부모님이 내가 그런 교회 생활을 하는 줄 아셨더라면 당장에 무슨 변이 났을 것이다. 부모님은 상상하지 못할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학생회에서는 여러 가지 행사가 꽤 많았다. 문학의 밤이나 수련회 등도 있었다. 교회 학교 교사를 하기도 했다. 그런 것을 준비하다 보면 학교생활은 뒷전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주일마다 했던 일이 있다. 학생회 총무 K의 사촌 K1을 데리러 가는 일이었다. 총무는 그 일을 내게 개인적인 미션으로 맡겼다. 그 당시에는 그것을 신앙적인 순종으로 여기고 충실히 K1을 만나러 갔다. 나와 같은 여고에 다녔던 K1은 교회에 다닐 생각이 없었다. K1은 H라는 선배의 아래채에서 자취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일면식이 없었던 H는,

'왜 쟤는 주일 아침마다 저 고생을 할까? 골백번 찾아와도 K1은 교회에 다니지는 않을 텐데'라며 속으로 혀를 찼다고 훗날 얘기했다. 내가 끈덕지게 K1을 찾아가는 모습을 인상 깊게 봤던 H는, 어느 날 우리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 발길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K1은 아직도 교회에 다니지 않는지 때때로 궁금하다. 아니면 나의 수없는 방문이 씨앗이 되어서 교회에 다니고 있으려나? 40년도 지난 이쯤에서 새삼 그게 궁금해진다.

수련회는 주로 섬에 있는 시골 교회로 가거나 기도원으로 갔었다. 몇십 명이나 되는 학생회 회원들의 식사 준비는 내 몫이었다. 수련회 시작 전에는, 단도리한답시고 준비 기도회가 더 뜨거웠고 나는 식사를 위한 식품을 미리 다 준비해야 했었다. 3박 4일 정도의 식사 메뉴를 미리 짜두어야 했었다. 그때는 냉장고도 제대로 없었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여름에 참가하는 학생들의 식사를 해대는 일은 지금 하라고 해도 자신이 없는 일이다.

그것은 신앙심이 좋아서는 아니었다. 내 앞에 벌어진 일이니까 책임감으로 했었다. 하루의 일정이 끝나면 다음 날 메뉴 걱정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재료가 여차하면 부족할 것 같고 자칫하다가는 남을 것 같았다.


수련회 먹거리를 책임지는 일은 대학생 때까지 이어졌다. 수련회에 가면 특강이 진행되곤 했다. 난 학생 신분으로 참가했지만, 뒤치다꺼리하느라 그런 프로그램에는 거의 참석하지 못했다. 식사가 끝나고 나면 다음 식사 준비로 짬이 나지 않았다.


“이름을 대모라고 고쳐야겠군!”

어느 해인가 수련회가 끝나고 모든 짐을 꾸려서 차를 타려고 내려오는 길에 강사님이 내 곁으로 와서 한마디 건네셨다.

‘특강에 한 번도 참석한 적도 없는데 어떻게 기억하시지?’

강사님이 나를 눈여겨보았던 모양이다. 학생이 어떻게 그런 일을 묵묵히 할 수 있느냐면서 그릇이 크다나 어쩐다나 그런 말씀을 하셨다. 평생에 흘릴 땀을 그즈음에 다 쏟은 것 같다. 그래서 지금도 더위가 기승을 부리면 땀을 줄줄 흘렸던 그때의 일들이 떠오른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그건 일에 대한 집착이었다. 그것은 믿음이 좋다거나 잘한다고 말할 것이 아니었다. 칭찬을 할 것은 더욱 아닌 듯하다. 그 시절의 나에게 돌아가서 일독에서 빼내어 오고 싶다.

요즘도 교회 안에는 그때의 나처럼 일 중심적으로 충성하고 봉사하는 성도들이 많을 것이다. 개인의 희생을 그런 식으로 굴레 씌우는 제도가 있어서는 안 될 것 같다. ‘충성하면 복을 받는다’라는 것은 기복신앙이다. 교회 일에 충성하거나 봉사를 하는 것은 감사에서 우러난 자발적일 때 가치가 있다고 본다.


헌금도 마찬가지다. 부흥 강사들은 사실무근인 수많은 사례를 읊어주며 성도들이 헌금을 많이 해서 물질적인 복을 받고 싶은 충동이 일도록 부추겼다. 부흥회가 한 번 끝나고 나면 집을 팔아서 헌금을 하거나 거액의 헌금을 작정하는 자들이 생긴다. 이것은 신앙의 척도가 될 수 없고 사기행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지금 나는 대모(大母)라는 별칭을 거부하고 싶다. 나의 한계 내에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살고 싶을 뿐이다. 이것이 지금의 나의 신앙이다.


[사진 출처: 픽사 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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