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고 대 선배의 시를 필사하다

- [서평] 박경리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by Cha향기

대한민국은 한강 작가 보유국이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 한강과 견줄만한 작가가 있느냐고 누가 묻는다면 바로 박경리 작가라고 답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여고 대선배이기도 한 박경리 작가는 그분의 삶 전체를 글쓰기에 바친 분이다.


작가는 장편소설 24권, 단편 48편, 산문집 10권, 시집 5권이나 출간했다. 그야말로 한국 현대 문학의 어머니다. 대하소설 <토지>를 완독 할 엄두가 나지 않아서 드라마로 시청하여 독서로 갈음했다. 첫 드라마는 재방송이 없어서 띄엄띄엄 봤고 두 번째 방영됐던 것은 정주행 했다. 특히 2004년에 세 번째로 방영됐던 드라마 장면들이 잔상으로 남아있다. <토지> 소설 배경, 하동군 악양면에 가본 적도 있다. 어쩌면 토지의 인물들이 실존 인물일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평사리에 가면 최참판댁 사람들이 곳곳에 걸어 다닐 것만 같았다.


박경리 작가의 일침


이번에, 소설가 박경리가 아닌 시인으로서의 작가세계를 들여다보고 싶어서 골랐던 시집이 바로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였다. 나이 육십을 훌쩍 넘기고 나서 읽는 작가의 시집은 그 메시지가 강하게 다가왔다.


작가의 미발표 신작 시 36편과 타계 전에 발표한 신작 시 3편을 모아 엮은 책에 정겨운 그림을 곁들인 시집이었다. 작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자신이 걸어온 길을 이야기하듯 들려주고 있었다. 유년 추억, 어머니 등 가족에 대한 기억, 그리고 문학 후배들을 위한 애정과 자연에 대한 작가의 마음이 녹아있다. 사회에 관한 관심과 잘못된 세상에 대한 일침도 잊지 않았다.




나는 오래도록 꿈꾸어 온 문학 장르가 있었다. 바로 시(詩)로 읽는 소설이었다. 한 편의 시를 읽었는데 소설을 읽은 것 같은 스토리시(詩) 말이다. 이 시집에서 그런 시를 몇 편 발견했다. 바쁜 시대에, 대하소설보다도 쇼츠 같은 짧은 시(詩) 속에 역사와 문화, 사랑과 인생을 엑기스로 녹여낼 수 있다면 독자들은 환대할 것이다.


1부 <옛날의 그 집>에서 '옛날의 그 집', '나의 출생', '바느질', '천성', '일 잘하는 사내', '인생' 등에서 그 스토리시(詩) 느낌을 받았다. '옛날의 그 집'의 일부는 뒤표지에도 발췌되어 있어서 나도 붓글씨 쓰는 기분으로 필사해 봤다.


▲ 옛날의 그 집/ 박경리 시

2부 <어머니>에도 스토리시(詩) 형태가 꽤 있었다. '어머니의 모습', '어머니', '어머니의 사는 법', '친할머니', '외할머니', '이야기꾼' 등이었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박경리 작가의 담대하고 거시적인 시선은 결국 어머니의 DNA로부터 온 것이었다.


'어머니의 모습'은, 일반적인 시(詩) 분량이 한 페이지 미만인 데 비해 무려 14페이지나 된다. 역시 대하소설 작가다운 시였다. 이 시를 몇 번 읽으면 박경리 어머니의 삶의 방식을 오롯이 알 수 있다.


그런데 더 거슬러 올라가 '외할머니'를 살펴보면 어머니의 기세에 눌렸는지 외할머니는, '말씨도 어눌하고 돈을 셈할 줄 몰랐다'라고 묘사한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곧잘 다투었다.
주로 어머니의 원망과 한탄이었다
대거리할 말을 찾지 못한 할머니는
입술만 떨었다. (74P)


이 부분에서 모녀지간이라 하여도 강대강, 강대약의 인간관계를 맺게 된다는 걸 엿볼 수 있었다.


▲ 소문/박경리 작가의 시

4부에 수록된 시(詩) 중, <소문>의 한 연에서 박경리 작가 어머니는 요즘 말로 하자면 대문자 T인 듯했다. 꽃을 뽑아버리고 상추를 심는 실용주의 어머니였다.


그 시에서 작가는 자본주의 세상을 비꼰다.

옛날에는 바람 따라왔던 소문이
이제는 전파에 실리어 오고
불 안 땐 굴뚝에 연기가 나는
마술 같은 일들이 진행 중이다


이 시집에는 바깥 풍경을 대신할 만한 그림이 곳곳에 놓여있다. 그림은 시(詩)를 뒷받침할 요량으로 품고 있는 의미가 꽤 깊어 보인다. 화풍이 독특하게 느껴지는 화가의 그림이 정겹다.


IE003567588_STD.jpg ▲ 시집에 수록된 삽화 그림


시집 마무리에 작가님의 앨범이 수록된 점이 특이하다.

한평생 글을 쏟아낸 작가의 표정은 지극히 평안해 보인다. 결국 작가는 버리고 갈 것만 남겨둔 사람답게 홀가분해 보인다.

IE003567590_STD.jpg ▲ 박경리 작가/시집 뒤쪽에 실린 앨범에서 캡처한 작가의 얼굴


이 시집을 감상하고 나니 홀가분해지고 싶어졌다. 몸도, 지닌 것도 덜어내고 싶었다. 옷장이나 창고를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홀가분해지려면 남기고 떠나도 괜찮을 정도로 비워내야 한다는 걸 알았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박경리 (지은이), 다산책방(2024)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196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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