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개월 전에, 바쁜 일정을 쪼개어 진주에 계시는 어머니를 만나 뵈었다. 어머니는 요양원에서 지내다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진주에 사는 여동생이 돌보기로 했었다. 여름 방학이 되자마자 열 일을 제쳐두고 친정어머니부터 뵈러 다시 진주로 갔다. 구순을 바라보는 어머니는 눈에 띄게 많이 수척해지셨다. 젊은 시절, 대가 차고 겁 없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기가 다 빠져나간 모습이었다.
신문이나 TV 뉴스를 보신 후에 세상 돌아가는 일을 낱낱이 다 알던 그 어머니가 아니었다. 내내 눈을 감고 계셨다.
“니가 안 와도 된다. 왜 왔노? 니가 눈에 뭣이 들어오겠노? 니가 안 와도 내가 아무 원망 안 한다. 자식이 그 지경인데 니 눈에 뭐가 보이겠노?”
정신도 흐릿해 보이고 의욕도 상실한 모습이었지만 나를 분명하게 알아보셨다. 그리고 손주가 자전거 사고로 오랫동안 병상에 있다는 그 사실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아, 어머니가 얼마나 기가 막혔으면, 자신의 기력이 다하는 순간인데도 손주 생각을 놓지 못하고 계시는구나.’ 맘속으로 어머니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었다.
외삼촌이 발행한 음원을 듣게 해 드리면 엄청나게 좋아하실 것 같았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아무 반응이 없었다. 외삼촌의 목소리를 단번에 알아내고 곧바로 노래를 따라 하며, 당신의 동생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았을 게 분명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옆에 있던 남편이, 평소에 어머니가 즐겨 부르던 노래를 한 소절 불렀으나 아무 관심이 없었다. 어머니는 음정, 박자는 무시하지만 2절까지 정확하게 가사를 기억하고 노래하는 것을 무척 좋아하셨던 분이다. 노래로 한을 푸신다고도 했었다. 그런데 노래를 잊어버린 듯했다.
침대 옆을 붙잡고 일어나는가 싶다가 1분도 안 되어 다시 누워버리는 행동을 반복적으로 하셨다.
‘인간 속에 있는 기(氣)가 저렇듯 빠져버리는 것이구나.’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겨우 눈을 뜨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시더니, 어머니는 넋두리하셨다.
“유학까지 시킨 놈을 그렇게 만들어놨으니 니가 우예 사노? (사실 유학 간 게 아니라 6개월 연수를 다녀왔을 뿐인데) 자전거를 사주지 말았어야지(자전거를 사준 적이 없고 자신이 마련한 것임), 헬멧만 썼더라도 그 정도는 안 됐을 텐데(교내에서 2~3분 정도의 거리를 이동하는데 헬멧을 쓰지 않을 수도 있는 건데), 나한테 한 달만 용돈 안 보냈더라면 헬멧 사줬을 텐데.”
‘아, 어머니에게는, 생을 마감하는 이 마당에 한 맺힌 것은 바로, 당신의 외손주가 자전거 사고를 당한 것이구나. 모든 것은 다 잊고 내려놓아도 그 한만은 어찌할 수 없으셨구나.’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무슨 죄가 그리 커서 자식이 저런 일을 당하노? 니가 죄가 많다.”라고 말씀하셨다.
‘흑흑, 도대체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어머니의 찐 사랑을 확인하고 있던 순간에 찬물을 끼얹는 말씀을 하셨다. 그 말은 나의 마음에 팍팍 박혔다. 자식이 졸지에 사고를 당하여 10년간 속 끓이며 사는 가슴에 소금을 뿌리는 듯한 말씀을 하셨다. 지금까지 이런 뼈 아픈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 소리를 어머니한테서 들어야 하는 것은 기막힌 아이러니였다. (죄가 많아서 그런 일을 당한다면?)
그것도 모자라서 또 말씀하셨다.
"지지리도 박복하네, 무슨 복이 그리 없노? 자식이 그 꼴이 되는 걸 봐야 하니 복이 없는 거지."
(이런 일을 당하는 자는 복이 없는 거라뇨?)
하지만 그 말씀이 평생 내 가슴에 남아서 한이 된다 하더라도 이제 다시 뵙지 못할 게 뻔할 것 같았다. 어머니가 나를 죄인이라 정죄하고 박복한 사람이라 하시니 귀에 거슬리고 맘이 찢어지지만 참을 수밖에 없다. 어머니의 앙상한 손을 한참 잡아드리고 그 본데없는 말씀에 대해서 용서하기로 맘먹고 어머니에게서 떠나왔다. 세월이 유죄요 인생은 무죄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는 어머니를 뵐 수 없을 것 같은 예고된 별리를 받아들일 맘을 단단히 해야 할 때다.
미리 해둔 약속이 있어서 이동하는 중에, 어머니를 모시고 지내는 동생에게서 연락이 왔다. J를 아느냐고? 40년이 훌쩍 지났지만 이름이 낯설지 않았다. 동생의 사무실에, 마침 J가 업무차 들렀으니 잠시 다녀가라고 했다. 헐레벌떡 동생의 사무실로 되돌아갔다.
손주도 보았을 중년 남자가,
“누나, 오래만입니더. 누나, 여전하시네?”라며 악수를 청한다. 하얀 교복 차림의 학생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길에서 스쳐가면 누군지도 모를 게 뻔한 한 남성이, ‘누나!’라고 부르는데 맘이 참 묘했다. 세월이 무상하다고 느껴졌다.
약속 장소에서, 여고 동창들과 선배를 만나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우리가 살아온 뒤안길은 모두가 다르다.
[진주, '국수의 사계'에서 옛 사람들을 만나다]
시댁 일에만 묻혀서
봉사활동으로
자기 사업으로
직장인으로
남편 내조로
[귀한 모임 장소를 제공해주신 선배님의 국수가게]
평생을 자신들의 일로 여념 없다가 우리는 세월의 길목에서 홀연히 만났다. 각자의 삶 속에서 무슨 일을 하며 어떻게 살아왔는지 우리는 서로 몰랐다.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살았든지 간에 자신의 길을 부지런히 달려왔다는 것이다. 유명한 사람이 되거나 지위가 높고 돈을 많이 모았다는 것 등이 다 부질없고 처한 그곳에서 자신의 몫을 해낸 우리는, 모두 박수를 받아야 할 것이다. 선배가 정성스럽게 제공해주신 국수와 쯔비면을 먹으며, 우리는 거울을 보듯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