폰에 3개월 정도 깔아 두었던 부동산 앱 2개를 삭제했다. 이제 그것을 이용할 일이 더 이상 없을 것 같다.
"이제 당신 그거 안 들여다봐도 되겠네." 부동산 앱을 지운다고 하니 남편도 후련했는지 말을 건넨다.
바야흐로 나는 부동산 시장의 늪에서 빠져나왔다.
집을 처분하고, 그리고 새 집을 장만하려고 우리는 부동산 시장에 몰입해 있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는 말마따나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은 다 했다. 30평 아파트를 구입했고 월세를 주고 있던 빌라를 팔아치웠다. 마지막 관문인 세컨 하우스, 'ㅅㅇ예가'가 끝까지 팔리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이사 날짜는 점점 다가왔다. 매매가 그때까지 되지 않는다면 무슨 수를 내든지 해야 할 것 같았다. 월세라도 불사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월세를 구한다는 분이 일단 집이라도 한 번 보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 그거야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러자고 했다.
"저희는 일단 현관 중문이 있고 화장실이 2개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집을 보러 왔어요." 집을 보러 온 분이 먼저 말했다.
'엥? 우린 팔려고 내놓은 건데? 일단 집만 한번 보러 온 게 아니었단 말인가? 계약이라니?' 나는 속으로 살짝 당황했다.
"저는 내부 인테리어가 맘에 들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집을 보러 온 분의 남편이 환한 얼굴로 말했다.
"저희는 월세로 내려고 집을 보여드리는 게 아닌데 두 분이 너무 마음에 들어 하시니 제가 살짝 맘이 흔들리네요."
나는 때때로 나 자신을 믿지 못할 때가 있다. 분명히 저렇게 진지하게 맘을 내보이는 분을 만나면 그냥 회까닥 마음이 바뀔 게 뻔하다.
"매매를 하려고 내놓은 집인데 요즘 워낙 거래가 뜸하여 결국에는 월세도 불사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라고 내가 말했다.
"이 집이 저희는 너무 맘에 들어요. 가능하시다면 월세로 계약하면 좋겠어요."
우리의 이사 날짜는 겨우 2주 정도 남았다. 3개월 동안 미동도 없었는데 2주 안에 집을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난다는 보장이 없다. 이 상황에서는 월세로 내는 것도 생각해 볼 만하다.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네요." 나는 집을 구하겠다고 온 부부가 너무 행복해하는 표정에 마음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월세는 세입자가 원하는 대로 월세 부분을 낮추고 보증금 부분을 올리는 방향으로 조정했다.
"저희의 요구에 맞게 가격도 조정해 주시고 좋은 집 내주셔서 감사해요."
"사시는 동안 편하게 잘 지내시면 좋겠어요."
그날 우리는 그 부부와 월세 계약을 하고 말았다.
"근데, 여보, 만약에, 만약에 말인데... 뒤늦게 집을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어쩌지?"
내가 남편에게 말했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을 것 같았다.
"이 사람아, 약속은 사회생활의 기본이야. 그런 전화가 오면 계약이 완료되었다고 딱 잘라서 말해."
"손해 배상을 해 주면 되지 않나?" 나는 짐짓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해봤다.
"돈으로 해결하는 게 제일 나쁜 거야." 남편이 단호하게 말했다.
MBTI 유형 중에서 ISFP( 성인군자형: 따뜻한 감성을 가지고 있는 겸손한 사람들)인 남편과는 어울리지 않는 말투였다.
남편의 저 모습은 분명히 DNA 때문일 것이다. 시어머니에게서 내려온 듯하다.
시어머니는 약속을 했으면 꼭 지켜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계셨다.
우리는 시누이의 소개로 만났다. 처음 만난 날 우리는 결혼 날짜를 잡았다. 시부모님은 당황했을 것 같다. 첫 만남 이후 삼일 만에 상견례가 있었다. 그 자리에 나는 오빠 내외와 나갔다.
나의 올케 언니는 그날 나를 지켜주었다. 상견례 자리로 들어가는 통로에서 얼른 내게서 멀리 떨어지더니 다른 통로로 걸어갔다. 키가 큰 올케 언니 옆에 내가 걸어가면 시댁 식구들이 나를 더욱 작게 볼 것을 염려해서였다. 센스쟁이 올케 언니였다. 올케 언니는 내가 키가 작아서 시댁 식구들한테 마이너스가 될 것이 걱정되었던 것 같다.
상견례 자리에서 신랑감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초록색 한복을 차려입은 시어머니의 인상이 참 좋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 동석한 시동생은 무척 미남이었다. 그 두 사람이 신랑감의 점수를 올려준 셈이다.
상견례가 끝난 후 올케 언니와 잠시 화장실에 들렀다.
"시어머니의 인상이 참 좋네요. 전형적이 한국의 어머니상이네요." 나는 상견례 자리에서 분위기가 좋았던 것 때문에 올케 언니에게 갑자기 'T.M.I.' 모드로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시어머니 좋은 인상 때문에 이 결혼 찬성일세. 시동생은 또 왜 저렇게 잘 생겼죠? 괜찮죠?"
아뿔싸, 잠시 후에 뒤편 화장실 문이 열리고 초록색 한복 자락이 화장실 출구 쪽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혹시 그때 시댁에 대해 흉을 봤더라면 나의 결혼은 그 자리에서 파투 날 뻔했다. 말조심은 하고 볼 일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맏며느리인데 키가 조금만 더 컸더라면 좋았을 텐데..." 시아버지는 내가 키가 작아서 내심 만족을 못하고 계셨다고 한다.
시아버지는 우리의 결혼 날짜가 잡힌 후부터 키가 작은 여자가 지나가는 것을 보시면,
"저 여자도 우리 며느리감보다는 키가 크네."
라며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않으셨다고 한다.
그러다가 현직 교사인 데다 인물 좋고 집안 좋은 데서 혼담이 들어왔다고 했다. 그녀는 키도 컸다고 한다.
"한 번 만나 보라 할까"라는 시아버지의 말씀에,
"그렇게 괜찮은 여자면 우리 아들보다 더 좋은 사람 만나겠구먼요. 이미 약속한 자리가 있는데 무슨 그런 생각을 한다요?"라고 시어머니가 냅다 화를 내셨단다.
"하도 아쉬워서..."
그날 이후로 시아버지는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시어머니는 약속을 참 중요한 것으로 여기신 분이었다.
시어머니는 배우지 못하신 분이지만 강단 있고 자존감이 높으신 분이었다. 약속이 중하다고 여기며 나를 지켜주셨던 그 일을 생각하면 시어머님이 존경스럽다. 그리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FIN]
[커버사진: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