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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향기와 찬양Lim Sep 11. 2023

명절 독박~

- 저는 옴짝달싹 못합니다. 명절에~

"가는 날이 장날이고(곡하는 날이 장삿 날이다) 아픈 날이 명절이다."


 어머니는 명절이면 여지없이 드러누우셨다. 그러시면서 저런 말씀을 종종 하셨다. 


"지글, 지글!"


명절 전날, 동네는 요리하는 소리가 가득했고 맛있는 기름 냄새도 풍겼다. 그러나 우리 집은 아니었다.


"이 집은 명절 음식도 안 하고..."


당숙모네 감꽃을 지푸라기에 끼워 목걸이를 만들며 놀았다. 추석이 되면 감나무에 단감이 탐스럽게 열렸다. 추석 전날이면 언제나 당숙모는 단감을 한 소쿠리 담아 우리 집에 오시곤 했다. 그리고는 혀를 끌끌 차시며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우리 집안을 둘러보셨다.




명절 전 날, 밤늦도록 우리는 돈을 셌다. 마대 포대에 담긴 돈을 방바닥에 쏟아붓고 돈을 정리했다. 명절 대목이면 어머니의 신발가게는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어머니는 갈고리로 돈을 긁어모으듯 명절 대목 장사가 잘 됐다. 사람들이 여러 겹으로 둘러 서서 신발을 샀다. 그때는 명절이 되면 겨우 새 신을 신을 수 있었다. 대부분의 집들이 슬하에 육칠 남매를 두었다. 온 식구들의 신발을 다 사려면 명절비를 툭 잘라야 했다. 명절 대목 장날이 되면 외삼촌이나 친척분 중 몇을 임시 알바생으로 세웠다. 몰려든 사람들을 정리하기도 하고 계산하지 않고 물건을 슬쩍 챙겨가는 사람이 있는지 봐야 했다.  


"사람이 피창 터진다 카이, 와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몰려오냐고?"


일급 알바생인 비렁뱅이 '우상사'는 매의 눈으로 사람들을 감시했다. 우상사한테 걸리는 날에는 온 장안이 시끄러울 판이었다.


그렇게 대목을 보낸 바로 다음 날, 어머니는 녹초가 되시곤 했다. 어머니가 편찮은 날은 일 년에 딱 두 번, 바로 명절날이었다. 그래서 내게는 명절이 즐거운 것이 아니라 우울하고 답답한 기억만 남아 있다. 


아마 철 모를 때였으리라. 


명절 제사상 위에 있던 삶은 문어를 통째로 들고나가 동네 아이들에게 한 다리씩 찢어 주었다. 그렇게라도 하니 명절이 약간 재미있었다. 애들과 함께 문어 한 마리를 맛있게 먹어치운 적이 있다.


"이 일을 어쩌노? 술상을 봐야 하는데 문어가 없으니..."

"그걸 통째로 들고나가는 가시나가 세상에 어디 있노?"


할머니는 없어진 문어 때문에 화가 잔뜩 나셨다.

나는 그날, 세상에  있는 욕이란 욕을 다 먹었다. 문어 다리에 박힌 빨판 개수보다 더 많은 욕을 얻어 들었다.

아무튼 유년 시절의 명절을 떠올리면 유쾌한 기억이 별로 없다.




결혼하고 보니 7 남매 장손 맏며느리였다. 그 자리는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듯했다. 모름지기 장손 맏며느리는 마음 푸근하고 일 잘하는 사람이어야 하는 법이다.


하여간 나는 명절마다 시댁에 갔다. 시댁은 먹을 사람은 많으나 주방일을 거들어 줄 일손은 없었다. 시어머니는 김치, 젓갈 등 밑반찬을 만드셨고 나는 부침개를 부치고 생선을 구웠다. 그러나 그런 것은 일도 아니었다. 많은 식솔들의 상을 차리고 치우는 일이 내 몫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들이닥치는 친척들의 술상을 보는 일도 내 몫이었다. 명절 기간 내내 앉아본 기억이 별로 없다. 식당 찬모도 그 정도로 일을 많이 하지는 않을 것이다.


결혼 10 주년이 지나서야 손아랫 동서가 들어왔다. 그다음 몇 년 사이에 셋째, 넷째 동서도 들어왔다. 그때부터 설거지 군번은 면했다. 그래도 명절에 친정 간다는 생각을 아예 하지 않았다. 많이 모이면 33명이나 되는 대가족의 모임에 내가 친정에 간다고 빠질 수는 없었다. 그래서 결혼 후 20년 정도 명절에 친정엘 가 본 적이 없다. 명절 독박이었다.


"너도 친정에 가 봐야 할 텐데."


사람 좋고 정 많으셨던 시부모님이었지만 끝내 그 한마디는 하지 않으셨다. 시누이들이 명절에 친정 오는 것을 기다리기는 하셨지만...


솔까말, 친정에 가지 않은 것은 나의 자발적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한정된 명절 휴가 동안에 시댁에 들르고 나면 친정까지 다녀올 시간이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아예 엄두를 내지 않았다.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면 시댁 쪽이었다. 나는 수도권에 사는데 시댁은 전남 영암이고 친정은 경남 합천이니 두 군데 다 들를 수는 없었다.

명절에 친정 간 적은 다섯 번도 안 된다. 그래서 시댁에서 가족끼리의 즐거움 뒤에 내가 치러야 하는 희생이 컸다. 내게는 명절이 별로였다. 




올해 10월 2일이 임시 공휴일로 정해졌다. 사람들은 길어진 명절 연휴라고 좋아하고 있다. 내가 근무하는 학교는 연초 학사일정에 그날을 재량 휴업일로 정해 놓았다. 그래서 그게 별 의미는 없지만 이번 추석 때 나는 7일간의 긴 연휴를 갖게 된다.


코로나가 어느 정도 진정되었다. 시댁이나 친정으로 가고 싶은 맘이 슬슬 생긴다. 또한 간단한 여행을 떠나도 될 정도로 연휴가 길다. 그러나 중증 환자인 아들이 11년째 몸져누워 있으니 명절 간병 독박이 기다릴 뿐이다. 


아들이 6년 정도 입원 생활 했을 때, 간병인은 명절이면 자기 집으로 갔다. 다른 간병인들도 대부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혹시 땜빵 간병인을 구하려고 해도 없었다. 집에 가지 않은 조선족 간병인들이 간혹 있기는 했으나 명절에는 몇 곱절의 일당을 요구했다. 

11년째 우리 부부는 명절을 반납하고 아들을 간병하고 있다. 명절날은 그렇다.


명절에 황당했던 경험도 있다. 명절에는 병원 근처의 모든 식당과 마트가 문을 닫았다. 식사를 챙겨 먹기가 곤란했다. 영업하는 편의점을 검색하여 찾아 간편식으로 식사를 때운 적이 있다. 그럴 때 참 을씨년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일상을 멈추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즐거운 시간을 가지는데 우리만 간병으로 묶여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이 집으로 와서 지낸 지 벌써 5년 째다. 여섯 분의 활동지원사가 있지만 명절 당일에 아들을 봐줄 수 있는 분이 없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명절 독박 간병을 해야 한다. 딸내미 내외가 오면 아들이 있는 본가로 가서 함께 명절을 쇠곤 한다.


이 명절 간병 독박을 피할 길이 없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명절에 옴짝달싹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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