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a향기와 찬양Lim Mar 21. 2024

20가지 '모둠쌈 채소', 어때요?

- '야채 탈수기'도 필요해요

2012년, 뉴욕 근처, 델라웨어대학에서 진행했던 인턴십 프로그램에 한 달간 참여한 적이 있다. 그때 홈스테이를 했다.

[홈스테이맘/ 홈스테이 맘이 차려주셨던 나의 식탁, 내가 챙겨 갔던 묵은지도 식탁에 올려져 있다.]

'홈스테이맘'은 백발의 할머니였다. 그러나 운전도, 요리도 다 잘하셨다. 그분은 베지테리언이었다. 그래서 늘 유기농 야채 가게에서 다양한 채소를 사 오셨다. 매일 이런 식단으로 식사를 한다고 했더니 다른 가정에서 홈스테이를 하던 동료들이 나를 몹시 부러워했었다. 그냥 빵과 버터 등 느끼한 요리로 식사를 하던 그들은 나의 웰빙 식단을 먹어보고 싶어서 내가 머물던 집에 놀러 오기도 했다.

[홈스테이맘의 반려견과 함께 라이딩 중]

홈스테이맘은 베지테리언이었지만 반려견과 나에게는 고기를 챙겨주셨다.


나의 동료 중 더러는 홈스테이맘이 기르는 개를 부러워했을 정도였다.

그분은 싱싱한 닭을 푹 삶은 후에 껍데기를 다 벗겨내고 살을 발랐다. 그 살코기를 찬통에 소분하여 두었다가 적당하게 데워 매 끼마다 개에게 줬다. 개 밥그릇은 법랑으로 꽤 비싸 보였다. 개에게 고기뿐만 아니라 푹 삶은 보리밥도 줬다. 개가 먹는 보리밥과 닭고기는 사람이 먹어도 제대로 된 식사가 될 정도였다.


그분은 유기농 야채 가게에서 사 온 각종 채소와 과일을 정성껏 잘 씻었다. 특히 야채를 씻은 후에 반드시 '야채 탈수기'로 물기를 완전히 뺐다. 야채 탈수기에서 나온 야채는 고슬고슬하여 먹기에 좋았다. 그때 내게는 야채 탈수기라는 것이 신문물이었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제일 먼저 야채 탈수기를 사리라.'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야채 탈수기를 구입했다. 야채는 반드시 야채 탈수기로 물기를 뺐다.


그런데 그해 11월에 아들이 자전거 사고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다. 내 삶의 지각이 흔들렸다. 야채를 씻어 우아하게 고기를 싸 먹는 것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생활 근거지였던 인천을 떠나 포항에 원룸을 얻었다. 우리 가족은 삶의 모든 끈을 내려놓고 아들을 간병하는 일에만 전념했다.


그러나 그것은 좋은 대처가 아니었다. 아들이 단 시간에 회복될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들의 투병은 기약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원룸 생활을 청산하고 털레털레 일상으로 되돌아왔다. 그 이후로는 중증환자 아들을 삶의 일부분처럼 품고 살았다. 그렇게 12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야채 탈수기는 비닐에 포장된 채 수납장에 놓여있었다.


6년 동안의 병원 생활을 뒤로하고 아들을 집으로 옮겼다. 의료보험 규약상으로 병원에서는 더 이상 운동 치료에 대한 보험 혜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집을 병원처럼 탈바꿈했다. 아들의 재활 치료에 필요한 모든 의료 기구와 장비를 32평 아파트에 구비했다. 병원의 1인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특실 중의 특실이었다. 우리 집은 아들의 병실이 되었다.


아들이 집으로 온 이후, 5년의 세월이 훅 지났다. 다행히 아들은 24시간 활동보조 지원 대상자가 되었다. 그래서 활보쌤들이 아들을 돌보고 있다. 그분들과 우리 부부가 그 집에 함께 기거하기에는 상호 불편하여 우리는 3년 전부터 세컨 하우스에서 지내고 있다. 아들 곁을 조금씩은 떠나 있을 수 있어서 그나마 숨을 쉴 수 있었다.




이번 달부터 나는 일명 '백수'가 되었다. 시간이 자유로워졌다. 정년 퇴임 교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틈만 나면 요리를 하고 가정 살림을 한다. 이른바 전업 주부다.

그런 내게, 지난 일요일에 한 지인이 모둠쌈을 소개했다. 35가지 모둠쌈 채소 중에서 수확 시기에 따라 구성을 달리하여 20가지를 묶음으로 보내준다는 것이었다.


긴 겨울 끝이라 싱싱한 야채를 먹으면 입맛 돌 것 같았다. 모둠쌈 채소를 구매 신청을 했다.


'그렇지, 야채 탈수기가 있었지!'


모둠쌈 채소를 먹기 시작하면서 12년 동안 수납장 속에 처박아 두었던 야채 탈수기 생각이 났다. 본가에 두었던 야채 탈수기를 챙겨 왔다. 앞으로 매 끼니마다 야채를 식탁에 올릴 참이다. 우리의 피가 맑아지는 소리가 벌써부터 들리는 듯했다.


[야채 탈수기/ 20가지 모둠쌈 채소]


모둠쌈 채소를 먹다가 지난 해에 만들어 두었던 쌈장이 생각이 났다. 청양고추에 멸치와 된장을 넣어 볶은 쌈장이다. 그것은 나의 '최애 반찬'이 되었다. 그 에피소드를 적은 브런치 글은 5만 뷰를 넘을 정도로 사람들이 많이 읽었다. 아무튼 그 쌈장과 모둠쌈 채소는 환상의 궁합이었다.


https://brunch.co.kr/@mrschas/350



오늘 저녁에는 오리 로스구이를 모둠쌈 채소에 얹고 그위에 쌈장을 살짝 올렸다. 그 맛이란? 둘이 먹다가 하나 죽어도 모를 맛이었다.


"그 맛 죽이네."


남편은 오랜만에 먹어보는 쌈장이 맛있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나는 야채 탈수기에 돌린 모둠쌈 채소가 참 맛있다고 우겼다.


"멸치를 찾아서 먹어 봐요. 그 맛이 일품이에요."


우리는 쌈장 속에 박혀 있는 멸치를 찾아 오리 로스구이 위에 올리며 시시덕거렸다. 재미있고 맛있었다.


[야채 탈수기에서 탈탈 털었던 모둠쌈 채소/ 오리 로스 구이에 나의 '최애' 쌈장을 올렸다.]


이제부터 우리 식탁에는
야채 탈수기로 물기를 쏙 뺀
모둠쌈 채소가 늘 올라올 것 같다.

#모둠쌈 채소  #야채 탈수기  #쌈장  #오리 로스구이

매거진의 이전글 수제비~, 좋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