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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향기와찬양Lim Mar 30. 2022

'Maison to Maison'을 아시나요?

- 영원한 집으로의 여정

'Maison to Maison'

  코로나 시대 동안에는 해외여행을 가는 것은 엄두를 못 냈다. 음악회, 전시회에 가는 것도 다 포기하고 지냈다. 이제는 코로나 팬데믹 시대를 마무리하고 위드 코로나로 삶의 빗장이 조금씩 풀리고 있는 듯하다. 축구장에 꽉 찬 관중을 보니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다. 그래도 코로나 때문에 여전히 조심스러운 마음이긴 하지만,

'Maison to Maison'이라는 전시회에 가보기로 맘을 먹고 티켓을 구했다. 이 전시회에 가는 발걸음이 설레는 이유가 있다.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나 토론토 온타리오 미술관(AGO) 등을 방문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일정에 쫓기어서 제대로 둘러보지 못했던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이번에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차분히 한번 돌아볼 요량이었다.

  팬데믹 시대를 보내며 모두의 시선이 ‘집’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나의 집, 나의 공간을 넘어 타인의 스타일과 감각을 발견하고 공유하는 시대. 철거를 앞둔 신사동 가로수길의 낡은 빌라는 새로운 콘텐츠로 가득한 전시장으로 변모하고 전시를 통해 경험하는 신선한 감각과 스타일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국내외 최정상 인테리어 디자이너와 스타일 리스트, 리빙 브랜드, 작가들이 모여 인테리어&리빙 트렌드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합니다.     

    기존 전시 공간에서 벗어나 밀라노 푸오리 살로네와 같이 개성 있는 공간에서 열리는 새로움 그리고 국내외 최고의 홈 인테리어 관련 전문가들이 꾸민 공간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Maison to Maison 사이트에서]

 

  모든 전시물들을 꼼꼼하게 챙겨보고 사진도 많이 찍었다. 그러면서 내가 살아왔던 집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고향 그 옛집

 

  고향집은 참 남루했다. 여유 공간이라고는  작은 집이었고 집 밖에는 시궁창이 흘다. 대문에서 문밖 화장실까지는 두 걸음 정도였다. 어린 나는, 그곳에 봉숭아꽃, 채송화, 코스모스, 해바라기 등과 같은 꽃을 심고 싶었다.

"옛집이 그립다"

 "콧구멍 만한 데에 꽃은 무슨 꽃? 배부른 소리 하고 있네. 너의 등짝에나 심어라."


 어머니는 몹시 화를 내며 나의 자그마한 소원을 무참하게 짓밟았다. 우리보다 훨씬 가난한 형편에도 마당가에 맨드라미나 달리아를 잘 기르는 집을 보면 행복해 보였다. 언젠가 내 집을 가지게 되면 꽃 가꾸기를 하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시린 날들의 집

 

 고등학교와 대학에 다니면서 여러 개의 자취집에서 살아보았다.

 처음으로 살았던 자취집은 여고 정문 바로 옆집이었다. 동생이 이른 새벽에 일어나서 아침상을 차려놓고 늘 나를 깨웠다.


"언니야, 아침 먹고 학교 가자."


 학교에 제일 먼저 등교하는 게 싫었다. 시내버스를 타고 아슬아슬하게 교에 당도하는 친구들이 멋있어 보다. 너무 가까운 건 별로인 것 같았다. 감칠맛이 없는 느낌이었다.

  그다음에 살았던 자취집은, 남자 고등학교 담 옆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성대에서 걸걸거리는 소리를 내는 남학생들이 시도 때도 없이 우리 방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게다가 내 또래였던 주인집 늦둥이 아들은 큰 소리로 가곡을 불러댔다. 그는 아마도 음악 교수가 되었을 것 같다.

  대학교 정문에서 자취를 했을 때는, 마당을 가운데로 하여 'ㅁ'자 모양으로 돌아가며 여러 개의 방이 있는 집이었다. 모든 방에는 하숙생들이 살았다. 그곳에서 불어 원어 연극 연습을 했던 기억이 있다. 남자 친구를 군대에 보내고 홀로 쓸쓸하게 돌아와서 울었던 방이기도 하다.


입식 부엌을 찾아

  

  신혼 생활을 안양에서 시작했다. 반지하였다. 주방을 건너서 방 안으로 들어갔고 화장실은 집 밖에 있는 것도 부족하여 기어 들어가야 할 만큼 천장이 낮았다. 게다가 그 화장실 뒷 공간에는 연탄을 50장 정도 쌓아둘 수 있었다. 연탄, 석유곤로, 가스레인지 등 세 가지의 조리 기구를 동시에 사용했었다.  

 옆집 새댁은 빨래를 하면 짜지 않고 빨랫줄에 줄줄 걸어 두었다. 하룻밤을 지나고 나면 빨래에서 흐르던 물이 멈추고 시간이 지나면 빨래는 결국 말랐다. 늘 젖어서 사는 기분이 들던 곳이었다.

  그것도 잠깐이었다. 어느 날, 남편이 고향 근처로 내려가자고 했다. 국가직 공무원이었던 그는, 전국 어디에서 근무할 수도 있었다. 전남 화순으로 발령이 났다. 남편이 먼저 가서 얻어 둔 집은, 창호지를 바른 여닫이 문이었고 부엌은 흙바닥이었다. 사글셋방이었다. 마당을 가로질러서 가는 화장실은 재래식이었다. 견디다 못하여 좀 나은 곳으로 이사를 했으나 재래식 화장실  신세는 면치 못했다. 마당 한쪽에 무화과나무가 있었고 읍 소재지의 양옥집인데도 화장실은 그 모양이었다.


 입식 부엌과 양변기를 갖춘 화장실이 있는 집에서 사는 것이 꿈이었다. 또다시 남편은 무안으로 발령이 났다. 역시 남편이 먼저 가서 살 집을 구했다. 여전히 재래식 화장실이었다. 드디어 입식 부엌이긴 했다. 그러나 대충 임시방편으로 만든 허접한 주방에다 싱크대만 들여놓은 곳이었다. 안방이나 주방은  창이 없었다. 그것이 화근이 되어, 아이는 밭은기침을 달고 살았다. 눅눅한 그 집을 포기하고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결혼 4년 만에 아파트에서 살게 됐다. 그것도 잠시, 남편은 완도로 승진 발령이 났다.

 그곳은 입식 부엌, 양변기 그런 것에 연연할 게 아니었다. 물이 부족하여 사람의 애간장을 녹였다. 섬에는 일주일에 한두 번 물이 나올 때 집안의 모든 그릇에 물을 받아 두어야 했다. 물차가 와서 배급을 해주기도 했다. 빗물도 받아두었다가 허드렛물로 사용해야 할 지경이었다. 그런 생활을 하다가 남편이 서울로 차출을 받아서 올라오게 되었다. 우리는 현재 살고 있는 인천에서 자리를 틀었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일이다.


화장실 2개를 찾아

 

  자녀들이 장성하니 집안에 화장실은 2개가 있어야만 했다. 방향도 뷰도 보지 않고 화장실이 2개인 집을 구하여 살았다. 그러다가 지금의 아파트에 살게 되었다. 남향이고 로열층에서 살다 보니 더 이상 집에 대해 바랄 것이 없었다. 베란다에 갖가지 꽃을 키우고 있다. 공기 좋고 교통 좋은 수도권 32평 아파트는 내게 과분할 정도로 만족스럽다.

"꽃이 좋다"

  그런데 아들이 덜커덩 큰 사고를 당했다. 아들은 6년을 병원에서 지내다가 3년 전부터는 퇴원하여 집에서 병상 생활을 하고 있다. 이제 그 아파트는 더 이상 안식처로서의 집이 아니다. 아들의 운동기구며 의료용품들이 온 집안을 꽉꽉 채웠다. 그래도 병원에서 생활하던 때와 비교하니 위생적이고 조용해서 좋았다.


  그런데 아들의 활동 보조 시간이 추가되면서 활동 보조사들이 야간에 간병하는 일까지 맡아서 할 수 있는 포인트가 생겼다.  그분들이나 우리가 상호 불편한 것도 있지만, 우리가 제대로 잠을 자고 쉬어야만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만족도 최상으로 잘 살고 있던 그 아파트를 포기하기로 했다. 그 아파트를 아들의 병실로 사용하고 우리는 인근에 있는 신축 빌라를 하나 구했다. 요즘 핫한 숲세권이다. 아참, 그리고 화장실이 2개인 집이다.


  문을 열면 곧바로 자그마한 공원이 있고 숲에서 뿜어져 오는 공기가 상큼하다. 처음에는 B&B 펜션용으로 구했으나 점점 이곳에 살림이 늘기 시작했다. 사람 사는 곳에는 있을 건 다 있어야 했다. 이 집에서 잠을 자고 아침과 저녁까지 먹게 되었다. 그야말로 세컨드 하우스다. 10년의 세월 동안 아들 병 바라지를 하던 우리가 지금쯤 지쳐서 쓰러질 판이었는데 이 기막힌 '별장'이 우리에게 삶의 창이 되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고달픈 이 나그넷길~'이라는 노래 가사가 입안에서 맴돈다.

한평생 참 많은 집에서 살아 보았다. 곰곰 세어보니, 결혼 전에 12개의 집, 결혼 이후에 12개의 집에서 살았다. 지금은 내 인생의 25번째 집에서 산다.




  구중궁궐 같은 집에 살고 있다 하여도 유한한 인생길이라 생각하면 모래성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어느 때일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속절없이, 황망하게 살던 집을 덩그마니 남겨놓고 영원한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런데도 대부분 사람들이 집을  마련하기 위해 반 평생을 보내고 있다. 때로는 집이 주거 목적 아니라 투자의 수단으로 삼는다.  


 우리에게는 집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 이 공간이 참 소중하다. 구석구석 먼지를 닦고 환기를 하며 잘 건사하고 있다. 피곤한 몸을 쉴 수 있고 자유가 있는 보금자리여서 좋다. 현재의 '나의 집'이 세상에서 제일 좋다.

"숲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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