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에 나는, 중학교 3학년 담임이었다. 11월 7일, 그때까지는 겨우 몇 장의 고입 원서만 접수시킨 상태였다. 아들의 사고 소식을 듣고 포항으로 달려간 후에,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가지 못했다.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때 학년 부장이었던 'A 선생'이 우리 학급의 부담임을 맡았다. 내가 당한 고통을 이해하며 부담임을 자처했다. 기억에 남는 특별한 후원이었다. A 선생이 우리 반 모든 학생들의 원서를 잘 써서 제출 마감하고 무사히 졸업까지 시켰다. 졸업식날이었다. 그곳에 참석도 못하고 아들을 간병하고 있던 포항에서 남몰래 꺼이꺼이 울었다. 그날 쓴 시다.
3-1반
수몰지구처럼
우리들의 때는 사그라졌다
파릇한 마음들이 모여
새를 기다리던 날들도 있었다
한 마음으로 일구었던
동쪽 그 따사롭던 교실
종종 병아리처럼
바르게 걷던 그들
시작은 함께였으나
배웅은 못한 쓸쓸한 손이
내 삶의 끝날까지
흔들리고 있으리라
시작노트: 그들이 졸업식 날 아침에, 문자와 카톡을 보내왔다. 생이별을 한 사람들처럼 담임이나 학생들이나 모두 가슴이 아렸다.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착하고, 멋있고, 대단한 그들이 너무 보고 싶었다. 졸업식에 못 간 담임은, 영원히 생채기를 안고 살아갈 것 같다. "얘들아, 미안해. 너희들을 만났던 2012학년도는 참 행복했었는데... 살다가 어느 날, 기적이 일어나면, 너네들한테 크게 한 턱 쏠 테다." (2013. 2. 8.)
그 후 3년이 지났다. 나는 이듬해 다시 복직을 했고 A 선생과 더욱 돈독한 동료애를 느끼며 학교 생활을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A 선생의 돌쟁이 아기가 응급실에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은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는 말이 있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나는, 내가 당하고 있는 고통 때문에 충격이 남달랐다. 무슨 큰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아기는 변비가 심했는데 그게 원인이 되어 급성 뇌졸중이 온 것이라 했다. 그 길로 아기는 인공호흡기를 끼게 되었다. 인공호흡기를 빼보지도 못하고 병원을 오가며 투병하다가 만 5년 만에 하늘나라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