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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긴 어디며, 우린 누굴까?

- 판결을 기다리는 죄수처럼

by Cha향기

▮대학병원 응급실에 요행히 입성했다.

아들을 실은 구급차가 2차 병원에서 접수를 거절당하여 어쩔 수 없이 대학병원으로 향했다. 그곳에 도착해서 남편과 119 구급요원이 응급실 입구로 갔다. 아들과 나는 잠시 구급차 안에서 대기했다. 다행히 그 병원 응급실은 아들을 받아주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피가래가 끓고 열이 나는 중증환자를 싣고 어디로 정처 없이 또가야 했을까? 짧은 순간이었지만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만만치 않은 처지에 놓여있는 우리 가족이 마치 보트피플에 실린 난민 같았다. 의료 공백이 심한 때인데 사지가 마비되고 인지도 없는 환자는 반갑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다 우리 가족이 이런 지경이 되어 살아가고 있는지? 비참한 마음이 막 밀고 올라왔다.


아들을 실은 이송용 침대가 출입문 속으로 들어갔다. 일단 응급상황을 면할 수 있겠다,라는 마음에 한숨을 돌렸다. 나는 뒤이어 도착한 활보쌤과 보호자 대기실로 들어갔다. 의자에 앉으니 핑 도는 느낌이 들었다. 긴장이 풀린 탓이다. 남편으로부터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일이 그냥 쉽게 쉽게 진행되지 않는 듯했다. 워낙 독감환자가 많은 때라 의료진 인력이 부족한 모양이었다. 응급실에서는 모두가 응급환자인지라 웬만해서는 대우받지 못한다.


▮응급실 진행 상황판에 아들의 이름이 보였다. 대기실 DID를 통해 응급실 안의 진행 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개인정보 보호 차원에서 이름의 가운데 글자는 ㅇ로 표시된 아들의 이름이 보였다. 에고, 그게 뭐라고? 합격자 발표 게시판도 아닌데... 아들의 이름이 보이니 반가웠다. 이쯤 되면 아들바보 인증각이다. 그러나 아무리 상황판을 지켜봐도 더 이상의 변화가 보이지 않았다. 아무 처치도 진행되지 않고 있다는 의미였다. 답답했다. 그래도 병원에 와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마음은 놓였다. 설마 뭣한 상황이 온다 해도 응급실 안에 있으니 도피처에 와 있는 셈이다. 남편이 옴짝달싹 못하고 응급실 안에 장시간 있다는 생각을 하니 걱정됐다. 그래서 카톡으로 남편과 대화했다.


"뭐해요?"

"그냥, 그러고 있네. 환자가 많아서 정신없나 봐."

"당신 화장실에도 가야 할 것이고 좀 쉬어야 할 것 같아요. 나랑 교대할까요?"

"그럴까?"


아, 그 순간이 내 독방 간병의 시작이란 것을 그때는 몰랐다. 남편이 벌게진 얼굴로 응급실에서 나왔다. 패딩 점퍼를 그대로 입고 있었으니... 아무튼 남편과 교대했다.


▮아들과 나는 응급실 격리병실에 유폐됐다.

내가 아들 곁에 있어야 소변을 갈아주기도 하고 제 때 석션도 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남편이 건네주는 바코드 라벨을 검색대에 터치한 후에 응급실로 들어갔다. 아들은 응급실 내부의 일반실이 아닌 격리실에 혼자 덩그러니 누워 있었다. 내가 들어가자 아들의 세포가 벌써 나를 맞이하는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나는 아들 홀릭인듯하다. 감염이 의심되는 환자라 응급실 내에서도 일반실이 아닌 격리실에 따로 있게 했던 것이다. 의료진이 몇 번 들어왔다 나가곤 했다. 마침내 링거를 꽂기 시작했다. 오랜 병상 생활로 혈관 찾기가 애매했다. 팔을 오므리는 중간 지점에서 혈관을 찾았다며 링거를 연결했다. 그 위치는 보나 마나 얼마 못 가서 곧 다른 곳으로 주사 위치를 바꾸게 될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아들이 한 번만 팔을 오므리면 주삿바늘이 우지직 구부러질 것이다. 그러나 내가 뭐라고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혈액 검사 결과가 나오기까지 아들과 나는 그 격리실에 갇혀 있어야 했다. 간호사에게 물었다.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하나요?"

"아, 네, 결핵균이나 악성 바이러스가 있는지 검사를 거친 후에 아무런 이상 없어야 이 격리실에서 나가실 수 있습니다." 간호사는 무미건조한 말투로 대답했다.


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지하였다. 그냥 숨 막히는 공간이었다. 투명 유리 너머로 많은 침상이 보였다. 응급 환자들이 들어오고 나가고 하느라 분주했다. 그곳의 공기는 우리가 있는 곳과는 사뭇 달랐다. 우리만 갇힌 공간에서 정체되어 있었다. 우리는 그 병실 안에 있는 공기만 가난하게 마시며 지내야 하는 형벌을 받은 꼴이었다. 그래서 유리 너머에 있는 환자들이 부러웠다. 적어도 그때는 그랬다. 그곳에서 나갈 수만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막다른 데에 다다르니 별게 다 부러웠다. 응급실에 있는 환자가 부러울 줄이야... 인지 없는 아들은 계속 입맛을 다시며 천정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색다른 환경이라는 것을 느끼는 듯했다. 긴장이 됐는지 아들이 소변을 자주 눴다. 나는 아들의 소변을 받아 내어 화장실에 내다 버리느라 분주했다. 아직 본격적인 입원생활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발바닥이 뜨거워졌다. 아들의 목관에서는 가래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그럴 때마다 비상벨을 누르면 간호사가 와서 석션기 카테터로 가래를 뽑았다. 아들의 열감은 여전했다. 점점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밀려왔다. 응급실 격리실 속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불안이 도사리고 있더라.


▮판결을 기다리는 죄수처럼 우리는 그곳에 있었다.

여긴 어디며, 우린 누굴까? 아들을 쳐다보는데 청승맞은 생각이 들었다. 처치를 기다리고 있는 몇 시간이 몇 년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혈액 검사의 결과에 따라 입원 혹은 퇴원이 결정된다. 나는 휴대폰을 보다가, 아들을 보다가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아침부터 서둘러 나왔건만 한 나절이 되어도 검사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마치 판결을 기다리는 죄수 같았다. 그럴 때 아들이 한마디만 할 수 있어도... 내가 하는 말에, 네, 아니요, 정도라도 소통할 수 있다면... 아들은 그냥 벽이었다. 벽 같은 사람과 함께 뭔가를 기다린다는 게 고역 중의 고역이었다. 응급실 격리실은 창살 없는 감옥이라는 것을 체험하는 중이었다.


▮배고파하는 자식을 보는 것보다 힘든 일이 있을까?

식사 시간이 지났다는 걸 어떻게 아는지 아들이 쩝쩝거리며 입맛을 다셨다. 아들의 배꼽시계는 여전히 잘 작동되고 있었다.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것과 자기 논에 물 들어가는 것처럼 좋은 게 없다 하지 않는가? 아들의 입에다 뭘 먹여보지 못한 세월이 13년 째다. 그런데도 아들은 배 고픈 것을 기가 막히게 잘 안다.

아들은 답답한 공간에 갇혀 있는 것이 불편한 게 역력해 보였다. 또한 시장기가 심하게 도는 모양이었다. 강직을 해대며 얼굴을 찡그렸다. 자식이 아픈 것을 보는 것이 힘든데 아픈 자식이 배고파하는 것은 목불인견이었다.


질병 없고 건강한 사람은
무슨 걱정이 있을까?

가족이 모두 건강하다면
뭘 더 바랄까?

[대문 사진: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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