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또다시 입원이라니, 양가감정이 몰려왔다
▮ 누룽지로 미음을 끓였다.
아들에게 홍시를 먹인 후에 설사하던 것이 다소 나아지는 것 같았는데 응가에 거뭇거뭇한 것이 보였다. 그걸 보니, 홍시를 내리다리 먹이면 안 되겠다 싶었다. 홍시 속에 소화하기 힘든 성분이 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아들은 13년째 경관 영양식만 먹어왔기 때문에 아들의 소화 기관이 홍시와 같은 일반 음식을 감당하기 힘들 수도 있다. 잘못하면 홍시로 설사를 멈추려다가 더 큰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의학을 의존합시다. 그분들이 전문적인 검사 결과를 토대로 내놓은 치료 방책이니 그걸 믿고 항생제나 설사약 현탁액을 다시 먹여야 하지 않을까요?"라고 남편에게 말했다. 남편도 시부지기 그러자고 했다.
다시 항생제와 설사약 현탁액을 먹였다. 그렇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나마 홍시로 약간 잦아들었던 설사가 더 심해졌다. 설사로 인하여 탈수가 올 수 있다. 엉덩이 짓무른 부분이 감염될 수도 있다.
일단 탈수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누룽지 미음을 끓였다. 누룽지를 푹 끓여서 도깨비 믹서기로 잘 갈았다. 그것을 다시 촘촘한 체에 걸렀다. 누룽지 미음을 따끈한 보리찻물에 섞은 후에 위루관으로 투여했다. 비록 설사를 하더라도 누룽지로 끓인 미음으로 최소한의 영양을 공급하려는 것이었다.
3주간 내리다리 설사를 해댄 아들은 살이 쭉쭉 빠졌다. 비만이 될까 봐 늘 걱정했던 아들 얼굴이 V라인이 되었다.
▮ 그날 아침, 마트 문을 열자마자 장을 봤다.
아들은 엉덩이가 짓무르는 것도 모자라 항문 괄약근 부위가 헐었다. 상처가 나서 피가 났다. 연고도 더 이상 약발을 받지 않았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떤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렇게 사투를 벌이는 시간이 또 한 주간 흘러가고 있었다.
그날 아침에는 누룽지를 넉넉하게 끓였다. 일단 곡기를 먹여야 한다는 엄마 마음이었다. 그런 다음에, 집 앞 마트에서 먹거리를 몽땅 사 왔다. 환자도 환자지만 우리도 먹고살아야 한다. 큰 냄비에 돼지고기, 두부, 콩나물을 넣은 김치찌개를 잔뜩 끓였다. 불현듯 그러고 싶었다. 갖은 야채를 씻어 다듬어서 야채 스틱도 만들었다. 제대로 된 집밥으로 점심을 먹어보려는 참이었다.
"여보 안 되겠다. 설사가 멎지 않네."라며, 본가에서 아들을 케어하던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렇죠? 일단 병원에 가면 수액을 맞고 영양제라도 놔주겠죠."
"입원하게 되면 당신이 또 힘들겠지만 다시 응급실로 가야겠어."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병원에만 가면 우선 맘이 놓일 것 같았다.
▮ 둘째 아이를 낳으러 가는 엄마의 맘이었다.
퇴원한 지 보름 만에 다시 입원할 생각을 하니 하늘이 노랬다. 첫째 아이를 낳으러 산부인과에 갈 때는 그냥 가지만 둘째를 낳으러 갈 때는 두 마음이 생긴다. 한 번 경험해 봤으니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기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고통이 얼마나 큰지 익히 알기에 두려움이 배가 되는 것이다. 그런 양가감정이 있지만, 다시 입원한다 해도, 그 힘들었던 독박 간병을 다시 한다 해도, 상관없다. 마음이 평안해졌다. 어쩌면 그건 편안해진 게 아니라 어떤 어려움도 감수하겠다고 단단히 각오하는 중이었을지도 모른다.
'한 번 했던 독박 간병을 두 번은 못하랴? 아들만 치료된다면 그 보다 더한 일도 해야지.'
아, 끝도 없는 모성애의 파워라니...
지난번 입원생활에서 불편을 느꼈던 것부터 챙기기로 했다. 그럴 줄 미리 알았을까? 휴대폰 메모 노트에 깨알 같이 입원 물품 목록을 적어 두었네. 나란 사람. 메모광. 이런 촉을 봤나? 그게 참 유용했다. 그래서 입원준비를 차분히 할 수 있었다.
나 자신에게 필요한 물품부터 먼저 꼼꼼하게 챙겼다. 크록스 신발은 필수품이다. 화장품, 속옷, 타월 등등도 잊지 않았다. 목록을 보고 챙기니 일사천리였다. 커피를 챙겨야지. 커피! 편의점에 내려가는 것도 번거롭거니와 거기서 산 커피는 내 입맛에 맞지도 않았다. 디카페인 알갱이 커피를 가져가면 끝난다. 한라봉차 빈병에 커피를 덜어 담았다. 그리고 텀블러도 하나 챙겼다. 포기할 수 없는 나의 피로회복제 커피여.
▮ 짐을 잘 챙겨가면 입원 생활의 질이 달라진다.
입원 오더를 받지 못하더라도 우리가 입원을 하겠다고 들이밀어야 할 상황이 됐다.
점심을 먹겠다고 준비했던 반찬을 소분하여 냉동시키고 누룽지 미음도 뜨끈한 상태로 냉동 보관했다. 마치 난리를 만난 피난민 같은 태세다. (아들이 입원한 이후에, 이 먹거리는 혼자 남아 있던 남편의 비상식량, 구황 식품이 되었다. 입맛 없던 남편에게 그나마 누룽지 미음은 목으로 넘길 수 있었단다.)
세컨 하우스에서 내 짐을 챙겨 넣은 가방을 메고 본가에 도착했다. 집안의 물건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남편이 그 단새 욕창방지 에어매트를 찾아 놓았다니. 이럴 수도 있구나. 일전에 입원했을 때 에어메트가 허접하여 여러 모로 불편했었다. 그래서 남편은 재입원을 하기로 결정한 순간에 에어매트부터 챙겼던 것이다.
안방 앞 베란다 화단 부분은 리모델링하여 마루로 만들어져 있다. 그 나무 마루 널빤지 뚜껑을 열면 잡동사니를 보관해 두는 널찍한 공간이 있다. 사실 그걸 열려면 마루 위에 놓인 군자란 화분들을 일일이 아래로 내려야 하기 때문에 남편이 그런 엄두를 웬만해서는 내지 않는다. 우리 집사람, 우리 집사람, 이 말이 남편의 십팔번이다. 활보쌤들이 어떤 일을 부탁하면 단숨에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급하니 맥가이버처럼 변했나 보다. 성능 좋은 여분의 에어매트를 혼자서 꺼냈단 말이지. 급하면 다 하게 되어 있네. 그 매트는 비치 에어매트 모양으로 생긴 것이라 어지간하면 욕창이 생기지 않는다. 그것만 준비되어 있어도 일이 많이 줄어든다. 체위 변경을 거의 하지 않아도 될 정도다.
그리고 잊지 말고 챙기자. 세숫대야, 고무장갑도.
이번에야 말로 꼭 챙겨가야 하는 것이 있다. 여러 장 만들어 두었던 깔개 절반 사이즈 순면 커버다. 아들의 엉덩이에 부직포 깔개를 깔아줄 수는 없다. 순면 커버를 씌워서 깔아야 상처가 덧나지 않을 것이다.
그토록 요긴했던 30*45 사이즈 크0랲 위생팩도 들고 가야지.
▮ 짐이 너무 많았다.
119 구급차가 또다시 왔다. 우리는 함께 119 구급차에 탔다.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들으며 병원으로 달렸다. 아들의 눈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아들도 이 결정에 동의하는 듯했다. 감옥으로 끌려가는 죄수가 그런 심정일까? 그것도 재범에 걸려 다시 옥살이를 하러 가는 죄수 말이다. 나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맘이 편안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로 맘먹고 나면 맘의 요동이 멈춘다. 일단 병원에 있으면 겁이 덜 날 것 같았다. 차라리 내가 고생하더라도 아들의 치료가 우선이다. 아들의 증상은 병원에서 해결해야 할 일이었다.
대형 에어매트가 한 박스요, 깔개 커버가 한 가방이다. 119 구급차를 타고 응급실에 가는 환자가 미리 입원할 짐까지 챙겨가지는 않는다. 그런데 우린 아예 입원을 하겠다고 작정하고 출발하는 중이었다. 그 짐은 일단 자동차 속에 두고 입원실이 정해지면 병실로 옮길 작정이었다.
119 구급차를 타고 곧바로 지난번에 입원했던 대학병원으로 향했다. 괜히 2차 병원으로 들이닥쳤다가는 딱지 맞을 게 뻔했다. 아들은 무사히 응급실 안으로 들어갔고 닫힌 문 틈으로 기나긴 침묵만 흘렀다. 함께 갔던 활보쌤과 보호자 대기실에서 하염없이 DID 안내판을 지켜보고 있었다. 점심때가 한 참 지났지만 수속이 진행되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응급실이 만원이란 것이 실감됐다. 의료진이 바빠 아들 진료 차례가 지연되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챙겨 온 짐을 보호자 대기실에 가져다 두려고 응급실 접수계로 가서 의논했다.
"저희가 입원할 것 같아서 짐을 미리 챙겨 왔는데 그 짐을 대기실 뒤쪽에 잠시 놔둬도 될까요?"
"그래도 되긴 하는데 분실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습니다."
"네에, 알겠습니다."
짐이 많아도 참 많다.
응급실 안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엉거주춤하고 있을 남편과 교대해야겠는 맘이 들었다. 카톡으로 남편을 불러냈다. 남편을 대신하여 바코드를 찍고 응급실 안으로 들어갔다.
살다가 우린 때때로 데자뷔 현상을 체험한다. 보름 전에 갔던 그 응급실에 우리가 또다시 있게 될 줄은 몰랐다.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응급실에 와 있는 우리 모습이 참 익숙하다. 입원을 하게 된다면 이번에는 호흡기 내과가 아닌 소화기 내과로 분류될 듯하다.
우리에게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
한 치 앞도 모르던 그때가
차라리 좋은 때였다.
[대문사진: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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