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혹을 떼려다가 오히려 더 큰 혹을 붙인 듯
▮ 혹을 떼려다가 다른 혹을 붙인 격이다.
그르렁거리던 가래소리는 점점 미미해졌다. 석션 통에도 더 이상 붉은 기가 보이지 않았다. 틈만 나면 뽑아갔던 피검사 결과, 염증 수치가 점점 낮아졌다. 그러나 문제는 설사였다. 가래 때문에 입원했는데 원치도 않았던 설사를 만났다. 간병 중에서 제일 힘든 게 설사하는 와상 중증 환자를 돌보는 일이 아닐까?
아들은 시도 때도 없이 설사했다. 두 손 두 발 다 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진땀을 빼며 다 치우고 나면 또다시 설사했다. 하필 그럴 때, 의료진이 아들을 살피러 오곤 했다.
"잠깐만요, 지금 안 돼요."라며 그들을 돌려보냈다. 커튼이 야무지게 닫혀있을 때는 커튼 속에 무슨 일을 하고 있다는 의미다. 병실에서는 커튼이 대문 역할을 한다.
"아, 큰 일 처리하시는구나. 그러면 잠시 후에 다시 올게요."
"어머나, 또 했어요?"
"어, 자꾸 이러면 안 되는데."라고 하면서 아들에게 왔던 의료진은 발길을 돌리곤 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6인실에 달랑 두 명만 입실해 있었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그날 저녁, 그 병실에 있는 환자에게 어떤 검사를 실시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 앞 침상에서 퇴원한 환자가 강남 S브란스 병원으로 간 모양이다. 입원수속 중에 '항생제 내성균'이란 것이 검출되었다는 연락이 왔단다. 그래서 같은 병실에 있던 환자도 검사 대상자가 되었다. 그 병원은 보호자 한 명만 상주하는 코호트 중인데 우리 병실은 '코호트 중의 코호트'가 되었다. 그날부터 비상 구급 위생품이 병실에 배치되었고 우리 병실에 들어오는 의료진은 'AP 가운'을 챙겨 입었다. 우리 병실은 '요 격리실'이 되고 말았다.('근자감 가득한 남자'와 라는 필자의 브런치 글에서 발췌)
그것 때문에 우리 병실에는 더 이상 환자를 입실시키지 않았다. 아들과 근자감 가득한 남자(근가남씨) 환자만 입원해 있었다. 그래서 설사를 치울 때 다른 환자들에게 민폐 끼칠 걱정은 덜 됐다. 아들 침상이 창가에 있으니 환기하기도 쉬웠다. 그냥 1인실이나 다름없었다. 우리는 좌측 창가 앞에, 근가남씨는 출입문의 우측에 있었다.
아무튼 가래에 피가 비쳐서 입원했다가 설사를 하게 됐다. 혹을 떼러 왔다가 운 나쁘게 혹을 붙인 셈이다. 억울했다.
▮ 산소 포화도만 안정되면 퇴원해도 됩니다,라고 담당 의사가 말했다.
설사가 심한 상태지만, 우리는 호흡기 내과에 입원했기 때문에 그 분야의 치료가 끝났으니 퇴원해도 되는 모양이었다.
"이번 주말에 퇴원하세요."
"설사를 저렇게 자꾸 하는데요?"나는 걱정이 되어 담당 의사에게 물었다.
"그건 소화기 내과와 협진하여 약을 처방해 드릴게요."
산소 수치의 안정을 위해 레블라이저도 세팅됐다. 레블라이저는 약물을 미세 에어로졸 형태로 분무하여 목관을 통하여 흡입하게 하는 것이다. 간병인들은 그것을 '가래 삭여주는 기계'라고 부른다. 아무튼 아들은 호흡기 내과적으로 봐서는 치료가 잘 되었다.
▮ 병실에서 별난 사람을 마주하기도 했다.
근거 없는 자존심이 가득한 남자가 같은 병실에 있었다. ('근자감 가득한 남자와...'라는 브런치 글)
또한 간호사들도 각양각색이었다. 아들의 석션을 해주는 간호사들의 성향이 다 달랐다. 어떤 간호사는 카테터를 길이대로 끝까지 목관 튜브 속으로 쑥 집어넣었다. 그럴 때면 아들은 고통으로 몸부림쳤다. 그렇게 발악하며 힘을 쓰니 아들이 바로 설사를 지렸다. 그 간호사의 의중은 이왕 석션을 하는 김에 가래를 깔끔하게 뽑겠다는 것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카테터를 너무 깊이 넣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기관지나 폐에 상처가 날 것만 같았다.
한편, 어떤 남자 간호사는 석션을 처음 해본다고 했다. 카테터를 튜브에 겨우 1cm 정도만 넣고도 덜덜 떨었다.
"아, 손 떨려."라고 남자 간호사가 말했다.
"선생님, 저는 13년간 석션해 봤으니 저랑 함께 석션하면 안 될까요?"내가 뜻밖의 제안을 했다.
"그래요?"라고 하더니 남자 간호사는 흔쾌히 동의했다.
"제가 카테터를 튜브에 넣고 가래를 뽑을 테니까 선생님은 카테터 호스 구멍을 눌렀다 뗐다만 하시면 돼요."
그 남자 간호사와 호흡을 맞추어 석션을 했다. 이럴 거면 차라리 보호자도 석션하게 놔 두지. 의료법상 병원 내에서의 의료행위는 의료인만 해야 하는 모양이었다. 요양병원에서는 간병인이나 보호자가 석션을 전담했는데... 병원마다 내규가 다른가?
▮ 얏호, 퇴원이다.
퇴원해도 된다고 하니 만세 삼창을 외치고 싶었다. 하루가 십 년 같았던 나날이었다. 일단 독박 간병을 면할 수만 있다면 살 것 같았다. 출옥하는 기분, 아니, 거짓말을 좀 보태어 말한다면 나라가 독립하는 것 같았다. 독박으로 간병하며 지냈던 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다.
"밤새 아무 일도 생기지 않으면 내일 퇴원하세요."라고 담당 의사가 그 전날 저녁 회진 때 말했다. 일주일 만이었다. 그런데 그날 밤에도 아들이 설사했다. 이튿날 새벽에도 설사했다. 본인도 힘들었겠지만 나도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앞이 캄캄했다. 이유를 막론하고 일단 퇴원하고 싶었다. 설사하는 중증환자는 혼자 감당할 일이 아니었다.
궁하면 통한다. 응가 처리하는 요령이 점점 생겨났다. 일단 깔개를 예닐곱 장 깔아 둔다. 설사할 때마다 한두 장씩 말아내면 한바탕 아시 수습이 끝난다. 침대 위에 특대형 위생팩을 준비해 두고 응가를 닦은 물티슈를 넣는다. 마지막으로 뜨끈한 물로 여러 번 사타구니와 엉덩이를 닦으면 끝이다. 재치를 발휘하니 포클레인으로 해야 할 일을 삽질하는 수준이 됐다.
퇴원하는 날, 남편을 만나러 로비에 내려갔다. 수납 절차가 막 끝났다고 했다. 구급차가 도착하면 곧 출발이다. 새벽부터 짐을 미리 챙겨 두었다. 구급요원이 올라온 후에 최대한 빨리 떠날 수 있게.
남편의 얼굴을 잠깐 보고 로비에서 올라오니 아들이 또 설사를 해놨다. 그 사이도 못 참다니. 또 한 번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혼줄이 났다. 다시 땀을 흘리며 혼자서 그걸 처리하고 기저귀를 채운 후에 옷을 입혔다. 남편이 로비에 있지만 병원규칙 때문에 올라와서 도와줄 수 없었다. 무슨 이런 변이 다 있단 말인가?
아들의 상태가 이 정도인데 퇴원하여 집으로 가는 게 맞나 싶었다. 그래도 병원에서 처방해 준 약을 먹으면 하루 이틀 후에 괜찮아지겠지.
제발 그랬어야 했는데...
하지만
인생이 내가 생각하는 대로 흘러가던가?
그때만 해도
더 힘든 일이 기다리고 있을 줄을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대문사진: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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