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중으로 감금되었던 응급실·격리실은 동굴 같았다.
▮ 내가 점심을 먹었던가? 아리송했다.
도대체 몇 시인지 몰랐을뿐더러 배도 고프지 않았다.
"당신, 뭣 좀 먹어. 내가 잠시 있을게."
보호자 대기실에 있던 남편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그때서야 아하, 인간은 때가 되면 먹어야 하는구나, 점심시간이 지났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먹고사는 것에 대해 한 순간 잊고 있었다. 남편은 활보쌤이 사다준 빵과 두유를 먹었다며 잠시 교대하자고 했다.
빵과 두유? 난 원래 두유를 먹지 않는다.
결혼 전, 아버지가 급성 말기암에 걸리자 이웃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너 나 할 것 없이 두유를 사들고 왔었다. 그때 두유에 딱 질렸다. 두유를 보면 홀연히 떠나셨던 아버지 생각이 났다. 그래서 두유를 마시면 목에 걸리는 느낌이었다. 아버지는 마지막 며칠간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고 눈을 감으셨다. 두유의 달짝지근한 맛은, 아버지께 죄책감이 생기게 했다.
그런데 그날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보호자 대기실에서 먹었던 빵과 두유는 참 맛있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까마귀를 통하여 선지자 엘리야에게 떡과 고기를 먹였다는 장면이 있다. 응급실에 갇혀 있는 내 모양이, 이세벨을 피신하여 그릿 시냇가에 숨어있던 엘리야와 흡사했다. 그날 빵과 두유를 챙겨 주셨던 활보쌤은 하나님이 보낸 까마귀 같았다.
▮ 몇 시간이 흐른 후에, 드디어 아들의 진찰 차례가 되었다.
"탈수 증세는 없습니다."라는 말을 들으니 다소 안심됐다. 설사를 해댔지만 누룽지 미음을 끓여 먹였던 것이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응급실은 빈 침대가 없을 정도로 환자로 가득 찼다. 응급실에 들어가지 못하여 변을 당했다는 뉴스도 봤다. 응급실에서 거절당하지 않은 것이 감사했다. 드디어 주사 라인이 자리를 잡았다.
아들은 이른 아침인 6시에 식사했을뿐더러 먹었던 식사보다 설사량이 더 많으니 배고팠을 것이다. 병(중중인 상태에서 폐렴, 그것으로 인한 설사, 또 도미노처럼 엉덩이 짓무름까지)과 사투를 벌이는 아들이 안쓰러웠다.
소변을 받아라, 채변을 해라, 등등... 진찰이 시작되는가 싶더니 바쁘게, 아주 바쁘게 검사가 속속 진행됐다. 채변통이 7개나 주어졌다. 아들은 더 이상 응가할 것이 없는지 소강상태였다. 인간의 심리가 묘했다. 체변을 해야 하니, 그동안 질리고 질렸던 응가였지만, 그때는 오히려 응가하기만 기다렸다. 때로 우린 모순적이다.
X레이 찍는 기구를 밀고 와서 여기저기 여러 방 찍어댔다. 거의 한 달간 고생하여 그로기 상태가 된 아들에게 검사라는 명목하에 별의별 것을 다한다. 게다가 설사로 영양흡수가 제대로 되었을 리 없다. 천신만고 끝에 만들어진 귀중한 피를 몇 대롱이나 뽑아 갔다.
병원에 오면 환자는 인체실험 대상자나 마찬가지다. 그래도 의료진 측에서는 검사를 통하여 그 결과에 따라 치료할 수밖에 없다. 그런 과정이 싫으면 병원을 떠나야 한다. 울며 겨자 먹기로 다양한 검사를 위해 몸을 내맡기게 된다.
▮ 격리실로 옮겨졌다.
해가 뉘엿해질 즈음에 아들은 응급실 내에 있는 다른 방으로 옮겨졌다. 문이 열리고 이어서 또 문이 열렸다. 문을 세 번이나 열고 들어가니 밀실이 있었다. 응급실·격리실이었다. 지난번에 이용했던 격리실과는 차원이 달랐다. 동굴 속 같았다.
"감염이 의심되는 환자라 여기 있어야 합니다. 병동 격리실에 자리가 생기면 거기로 옮겨갈 겁니다." 우린 갇힌 신세가 되고 말았다. 아들은 치명적이고 지독한 바이러스 보균자 취급을 당했다.
화장실은 물론 파우더룸도 겸비되어 있었다. 그런데 사방이 벽이었다. 만약 화재가 발생한다면 그 자리에서 곧바로 질식하고 말 곳이었다. 제발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길 바랐다. 그곳에 들어가자마자 아들은 영역 표시라도 하듯 또 한바탕 설사를 했다. 아뿔싸, 거기는 간이침대였다. 일반 병실 침대의 절반 넓이였다. 아들은 온몸에 주렁주렁 라인이 걸려 있거니와 잦은 설사 때문에 래원했는데 그 좁은 침대에서 어떻게 처리하지? 모로 눕힐 공간이 없는데?
남편은 그 방으로 짐을 옮겨 준 후에 어쩔 수 없이 응급실을 떠났다. <보호자는 한 명만 가능. 교대 안 됨.>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나는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그놈의 '독박 간병 팔찌'를 또다시 끼지 않을 수 없었다. 적막강산이 따로 없었다. 아들과 나만 달랑 유폐됐다. 의료진도 오지 않고, 개미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나의 독백만이 메아리쳤다.
"00아, 괜찮을 거야. 힘들어도 조금만 참아. 병원에 왔으니 걱정 안 해도 돼"
그다음에 무슨 말을 하지? 대답 없는 아들에게 더 해줄 말이 없었다. 차라리 벽과 티키타카 할까?
▮ 죄수처럼 자유를 박탈당했다.
6중으로 감금됐다. <을사 유폐>라고 내 개인 역사에 기록할까보다. 간호사를 만나려면 바코드를 터치하여 두 개의 문은 연 후에 다시 비상벨을 눌러야 했다. 그러면 담당간호사가 와서 그 문을 열어준다. 이 정도면 감금이 맞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저녁을 먹어야 했다. 비상벨을 눌러 간호사를 불렀다.
"보호자 식사를 신청해도 되나요?"
"응급실에는 식사가 제공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못 나간다면서요?"
"그렇긴 하지만 잠깐 편의점에 가서 해결하고 오세요."
OMG! 식사 한 번 하려면 여섯 개의 잠긴 문을 통과한 후에 다시 로비로 들어가는 문을 열고 편의점에 가야 했다. 미로 게임을 방불케 했다. 편의점 김밥을 또다시 먹기로 했다. 먹어야 아들을 돌볼 수 있다. 달리는 자동차에 주유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 달랑 김밥만 한 줄 샀다. 로비는 어두컴컴했다. 아스라이 미등만 켜져 있다. 둥그런 소파에 앉아 김밥을 먹었다. 차갑다. 김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더라. 꾸역꾸역 먹었다. 두 개씩, 세 개씩 밀어 넣었다.
"대신에, 얼른 오셔야 합니다."
나를 격리실에서 겨우 내보내 준 간호사가 부탁했던 말이 내 목에 걸려있는 듯했다. 김밥은 입으로 들어가고 눈에서는 눈물이 나왔다. 서로 교대 중이었다. 김밥과 눈물이... 들숨과 날숨처럼...
▮밤새 절반짜리 깔개 커버를 빨았다.
유폐된 격리실에서 아들을 엎치락뒤치락하며 설사를 치웠다. 그럴 때마다 절반 사이즈 깔개 커버를 빨아야 했다. 한 가방 가득 가져갔던 깔개 커버를 한정 없이 빨았다. 다행히 미리 챙겨갔던 고무장갑과 세숫대야가 있어서 수월했다. 중환자용 격리실이라 난방이 빵빵했다. 게다가 깔개 순면 커버 원단이 손수건 재질이라 돌아서면 말랐다. 시간은 빨래를 말리고 세월은 내 눈물을 말렸다.
▮아들은 지독한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을 것으로 의심되는 환자였다.
날이 밝았다. 밤을 홀딱 새웠지만 아침은 먹어야 한다. 세 번째 문에서는 벨을 눌렀다. 내가 SF 영화를 찍고 있나 싶었다.
"무슨 일이세요?"
"편의점에 좀 다녀오려고요."
"여기서 그렇게 나가면 안 되는 거 아시죠?"
"그런데 편의점에 가서 식사를 하거나 병실에 들고 와서 먹어도 된다고..."
"그거 원래는 안 되는 거 아시죠?"
"그러면 사람이 굶으면서 간병해야 하나요?"
"다른 보호자가 식사를 넣어줘야 하는 거 아시죠?"
그 간호사는 밤새 힘든 환자를 돌봤을까? 참 쌀쌀했다. 설마 나보다 힘든 밤을 보냈을까? 그렇다 치고, 먼 곳에 있는 가족이 내 식사 하나를 전달해 주러 매번 달려와야 한단 말인가? 말이야? 똥이야? 방귀야? 규칙이 그렇다면 이해는 가는데 새벽 댓바람부터 말투 한 번 재수 없더라.
서러웠다. 밤새 잠 한숨 못 잔 것도 힘들었는데 공감 제로였던 그 간호사의 말이 지금까지 가슴에 맺혀 있다. 법은 그렇더라도, 참 억울했다.
편의점에 다녀오는데 간호사실 데스크에서 한 간호사가 내게 말했다. 병동 특실에 자리가 생겼다고. 그래서 응급실 격리실에서 그곳으로 이동할 것이라고. 그러면 6중 감금 상태에서는 해방되려나 보다. 그때의 심정으로는 그 격리실에서 나가기만 해도 숨을 쉴 것 같았다.
- 그 방에 계시던 분이 지난밤에 돌아가셨다죠?
의료진끼리 나누는 얘기를 엿들었다. 병동 특실이란 게 사람이 죽어야 생기는 자리였다니 참 값진 자리다. 누군가가 그토록 누리고 싶어 했던 새날을, 우리는 살아서 맞이했다니.
"그 특실은 일박에 00만 원입니다. 그걸 사용하시겠다고 동의서에 사인해 주시겠어요?"
우리가 그 특실을 사용한다고 했냐고? 그곳에 가야 한다 하니 어쩔 수 없는 거지. 마치 환자 측에서 그 병실에 가기를 원하니까 제공하는 것처럼 하는 이 황당한 시추에이션은? 이해가 안 됐다.
"어쩔 수 없죠. 가야죠. 돈이 들더라도. 그나마 자리가 생겨서 다행이네요."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눈칫밥을 먹어가며 편의점에 가서 사 왔던 것이 빵이었는지 김밥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한시바삐 격리실에서 해방되고 싶었지만 좀처럼 옮기라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우리가 가게 될 특실을 정리하는데 한나절이 걸리는 모양이었다. 마침내 의료진이 환자를 이동시키러 왔다. 짐은 그대로 남겨 두고 환자만 먼저 옮겼다. 그래도 이사는 이사다. 병실을 꼼꼼하게 스캔했다. 두고 가는 것이 없는지 체크했다. 수납장도 다 열어젖혀보았다. 이상 무! 짐을 옮겼다. 짐꾼이다. 벌써 네 번째 짐을 옮긴다. 이렇게 내가 이사를 후다닥 잘하니, 한 때 이삿짐센터 사장이 나를 스카우트하겠다고 러브콜을 했었나? (세컨 하우스로 이사하던 날, 내가 척척 일 머리를 틀어주며 짐 나르는데 도움이 되니, 이삿짐 사장이 나를 탐냈다. 근데 '저, 현직인데? 어쩌죠?'라며 속으로 웃었다.)
응급실 격리실에서 나가긴 하지만 우린 여전히 바이러스 보균 의심환자였다. 병동 특실은 호텔 같았다. 비싼 것은 제값을 한다고 했던가? 아무리 그래봤자 그곳은 격리 환자용 병실일 뿐이다. 응급실을 탈출한다고 뭐가 달라지려나?
펼쳐지는 상황은 암담하기만 했다.
산을 넘으면 또 산이 있는 것처럼
산 넘어 산이었다.
[대문사진: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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