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파스텔 톤으로...)

# 아이스 블루(Ice Blue: 차가운 느낌의 연한 파란색)

by Cha향기

빌딩 속은 음산하게 시끄럽다. 빌딩 속에서 나는 소음은 때때로 이명처럼 일정한 데시벨이다. 그런 빌딩 숲을 떠나 출장을 떠날 기회가 생긴다면 그게 일상 탈출이다.


이번 출장지는 진주다. 팀원들 의견도 물어보지 않고 그곳엘 내가 가겠다고 나섰다. 그것도 칠암동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제 그곳에 다시 설 수 있는 때가 됐는지도 모른다. 설령 내가 그곳에 간다 해도 아무도 나를 알 턱이 없다.


열다섯 어린 소녀가 40년의 세월을 보내고 나면 몸 어디에도 옛 모습은 없어지기 마련이다. 시장에서 우연히 만나 싸워도 서로를 몰라볼 것이다. 세월이 내 모습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으니 모자를 눌러쓰지 않고 당당하게 진주에 가보기로 맘먹었다.


남강의 물 빛깔을 찬찬히 들여다보거나 진양호에서 고요한 안식을 한 번 누려볼 맘이 든 건 처음이다. 마침내 때가 됐다. 마음이 되면 모든 것은 된 것이다. 그래 진주에 가자. 칠암동에 가자. 하지만 도망쳐 나온 도시, 나를 얕잡아 볼 것만 같은 그 도시, 내가 누구인지 알아버릴 그 도시에 우뚝 설 자신이 평생 없었다. 그 도시만은 가지 않겠다고 이를 악물고 살아왔다. 내가 살 곳은 진주만 아니면 괜찮았다. 나의 정체성을 모두 감추고 까르르 웃으며 살 수 있었다. 꼰대도 될 수 있었고 된장녀가 되기도 했다. 그런 삶은 편안하고 좋았다.


그러나 맘속에서 불쑥불쑥 나를 흔드는 종소리 같은 게 났다. 자꾸만 비아냥거리며 나를 조롱하는 듯했다. 그건 네가 아니잖아? 잃어버린 너를 찾아라. 그런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일에 매몰되거나 술을 마셔도 그림자처럼 나를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미세한 음성이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잘난 사람으로 사는 게 좋았다. 신분 세탁은 성형보다 내겐 더 좋았다. 선지자도 고향에서 높임을 받지 못한다는 말이 있듯이 나는 진주만 아니면 어디서나 잘 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지금의 나를 사람들은, 나를 꼰대 중에 꼰대요, 화려하게 옷을 입는 멋쟁이로 알고 있다. 만약에 진주에 돌아가서 나 자신의 허울이 벗어진다면 지금의 나는 무너지고 말리라. 내가 진주에 돌아가지만 않는다면 눈을 감을 때까지 지금의 행복을 그대로 간직할 수 있다. 모든 것은 술술 풀렸고 사는 것도 평화로웠다. 살만한 세상이었다.


현실의 벽을 탄탄히 지키며 여생을 지금처럼 살면 그만이다. 그래서 현재의 끈을 놓치면 곧바로 발밑은 낭떠러지가 되고 죽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의 벽에 서서히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며칠 전에 읽은 시 한 편으로 틈새가 생기더니 탄탄했던 벽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정진규 시인의 <연애시절>이란 시를 읽었다.


연애시절
늘 예감에 시달렸지 또다시 한철이었네 한 철 가고 있네 마침내 오고 말았네 햇빛 먼저 닿았던 동쪽부터, 웃자랐던 즐겁고 행복했던 날들부터 풀잎들 시들기 시작하데 속도가 빠르데 서쪽에 이르러선 잠시 이별을 달래데 노을 붉데 서쪽 바다, 제 몸이 무거워 그만 수평선 아래로 한참을 걸려 무겁게 몸 누이는 해, 그를 만난 적도 있네 (중략) (정진규)


‘그를 만난 적도 있네’라는 시 구절 앞에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오빠가 확 그리웠다. 한평생 내 감정을 억누르며 깡그리 잊고 살려고 했는데, 망각하게 하는 약이 있다면 매 순간 삼키며 살고 싶을 정도였다. 마치, 구정물에 돌을 던진 듯, 가라앉아 있는 맑은 물에 작대기를 휘저은 듯 맘속은 요동치기 시작했다. 내 감정이 마구 뒤집혔다. 참을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나는 진주를 간간이 떠올리기 시작했다.


때마침 진주에 출장 건이 생겨
핑계 삼아
진주에 가기로 맘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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