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이스 블루(Ice Blue: 차가운 느낌의 연한 파란색)
나는 어쩌다가 칠암동에 살게 되었을까? 꿈인지 생시인지? 내 기억의 맨 밑바닥에는 아기 때 내 모습이 아른거린다. 그것이 나의 첫 기억인 듯하다. 어린 나는 누군가의 등에 업혀 있었고 내 옆에는 오빠도 함께 걷고 있었다. 배를 탔던 것 같다. 고무신 한쪽이 떨어져서 그걸 집겠다고 고집 피웠던 것도 어렴풋이 생각난다. 아무튼, 오빠가 옆에 있었던 것 같다. 아니면 오빠 만한 다른 누군가 인지도 모른다. 아, 너무 오래된 기억은 입김으로 호호 불어 말끔하게 해보려 해도 더욱 흐릿해진다.
진주에 당도했을 때 칠암동 어머니가 나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여기가 니 집이다. 너는 이제 내 딸이고.”
그 쟁쟁한 소리는 평생 내 귓전을 떠나지 않았다. 그 순간은 어머니가 진심으로 나를 안았던 것 같다. 내가 오빠를 칠암동에 가서 만난 게 아니라 오빠와 함께 칠암동에 갔다는 내 기억은 신기루일까?
창휘 오빠는 늘 다정했다. 그래서 오빠만 보면 눈물이 났다. 오빠만 보면 그냥 좋아서 가슴이 쿵쾅거렸다. 세상에 가장 행복한 일은 사람을 좋아하는 일이란 것을 광휘 오빠 덕분에 알게 됐다. 그래서 오빠는 내 맘속의 화로였다. 내가 살아갈 에너지와 온기 같은 것이었다.
여섯 살 정도 됐을 때였다. 대문간 처마 밑에서 울고 있었다. 밤이 깊어도 어머니는 나를 방으로 불러들이지 않았다. 그날 꾸중을 들은 이유는, 내가 픽하면 운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 일 이후로 나는 웃을 일이 있어도 웃지 않았고, 울고 싶어도 울지 않는 데 길들고 있었다. 감정을 억제하는 기술자가 되어 버렸다. 습관처럼 감정이 억제되다 보니 내 속에는 감정의 물기가 아주 말라버린 듯하다. 촉촉함이란 찾아볼 수 없고 버석거리는 감정으로 그냥 일처리만 잘하는 사회인이 되고 말았다.
밤공기가 안개를 가득 안고 있어서 눅눅하게 차가웠다. 대문 간에서 새벽을 맞이했다. 두렵고 추었던 그 밤은 억겁의 세월만큼이나 길었다. 어둡지나 말든지, 무섭지나 말든지, 그 밤은 내게 지옥이었다. 날이 조금씩 밝아오자 차소리가 점점 시끄러워졌다. “재첩국 사이소!”라는 외침과 교회 종소리도 한데 어우러졌다. 그런데 저만치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오빠였다. 오빠도 하얗게 밤을 새웠던 게 분명했다.
“추웠지? 이거.”
오빠는 자기의 두꺼운 점퍼를 들고 나왔다. 그리고 잽싸게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그때 오빠가 건넨 점퍼는 새벽 추위를 충분히 감쌌다. 그 이후로 맘이 쓰리거나 한기를 느낄 때면 그 점퍼부터 떠올리곤 한다. 기억 속의 그 점퍼는 나의 애착 오브제였다.
오빠가 건네준 점퍼 속에 파묻혀, 나는 깊은 잠에 빠졌다. 해가 중천에 떠올라도 어머니는 나를 집안으로 데려가지 않았다. 그날부터 나는 어머니한테 정이 뚝 떨어지고 말았다. 어머니가 나를 싫어한다기보다 내가 어머니를 본격적으로 싫어하기로 결심했다. 어머니는 내 어머니가 아닌 게 분명했다. 어린아이가 그걸 촉으로 느끼고 말았다.
"너무하네. 이렇게 어린 애기를."
쌀집 아주머니가 나를 방으로 안고 갔다.
"밥 좀 먹어라. 어린것이 무슨 잘못을 했다고?"
쌀집 아주머니는 코끝을 훔치며 훌쩍였다. 그래도 나는 울지 않았다. 쌀집 아주머니가 나를 대신하여 울어 주시니 참 고마웠다. 그때부터 맘 속으로 쌀집 아주머니를 은근 의지했다. 나를 대신하여 울어주는 사람은 나를 해롭게 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가족들은 오빠에겐 다정했다. 부모님은 외출할 때면 오빠를 항상 데리고 다녔다. 오빠가 어머니께 혼나는 걸 본 적이 없다. 사람들은 나와 오빠를 대하는 표정이 달랐다.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이 사람을 차별하여 바라본다는 것을 알면서 세상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따뜻한 눈빛을 찾아 어디든 가고 싶었다. 그런데 정작 나는 다른 사람을 향하여 따뜻한 눈빛을 보내지 못하며 살았다. 받아본 따뜻한 눈빛의 총량이 부족하여 내보낼 따뜻함이 고갈되었던 것 같다.
“우리 집 기둥, 우리 집 기둥” 큰 어머니는 오빠만 보면 그렇게 말했다. 아예 큰 어머니는 오빠를, "기둥아~"라고 불렀다. 그도 그럴 것이 미정 엄마(큰어머니의 며느리)는 미정이 하나만 낳고 망단했다. 그래서 큰 어머니 쪽에서는 대가 끊어졌다고 여긴 듯하다.
어머니는 오빠에게 좋은 옷과 비싼 물건을 아낌없이 사주셨다. 그에 비해 나에게는 따뜻한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어쩌다 마주치는 어머니 눈길은 나를 멸시하며 존재를 깡그리 부정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나를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듯했다. 그냥 미물로 생각하는 모양새였다. 어머니는 내겐 마귀할멈 같았다.
나는 현실판 신데렐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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