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이스 블루(Ice Blue: 차가운 느낌의 연한 파란색)
20대에 진주 칠암동 문전을 몇 번 서성거렸다. 그즈음에 나는, 정진규 시(詩)에 홀려 있었다. 줄줄 외우고 있던 몇 편의 시 가운데, ‘우리의 사랑이 저물 때’를 되새김질하곤 했다. 칠흑같이 숨겨둔 내 사랑을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다. 빛 한번 쬐지 못한 사랑이 저문다는 생각을 하면 내 생이 아득한 음부까지 내려가는 듯했다.
아직은 푸르던 한 坪쯤의 풀밭마저 못쓰게 되었을 때,
이제는 下直을 고할 수밖에 없을 때, 그렇게 우리의 사랑이 저물 때,
석양의 어디쯤 홀로 가고 있을 때,
그러할 때일지라도 막막하고 막막하게 쓰러지지는 마실 것
어둠을 퍼내어 들판에 부리고 오는 사람,
새벽길에서 만나는 새벽 사람이고자 하실 것
절망을 믿지 마실 것 우리는 떠나와서 하염없이 떠나와서
이른 봄날 강가에 당도하여서 한숨으로 바라보았을 때
이윽고 풀리는 겨울 江의 작은 뒤채김 같은 것, 어렵게 돋아나는
풀잎 하나의 초록빛 같은 것, (중략) -정진규
'그러할 때일지라도 막막하고 막막하게 쓰러지지는 마실 것'이라는 구절을 늘어진 카세트테이프처럼 무한 반복하여 외웠다. 그 시를 읊조리다 보면 진주로 달려가고 싶어서 안달이 나곤 했다. 그냥 진주에서 부는 바람만 쐐도 살 것 같았다. 진주에 당도하여 공기를 맘껏 마시고 나면 가슴을 누르는 통증이 사라지고 숨쉬기가 쉬워졌다. 진주에 갈 때는 모자를 눌러쓰고 갔다. 그 누구도 나를 눈여겨보지도 않았건만 나는 나 자신을 꼭꼭 숨기는데 명수가 되었다.
마침내 내 모습을 감추지 않고 진주에 가는 중이다. 출장은 핑계일 뿐이다. 진주로 향하는 버스 속에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예상치 못했던 일이다. 눌러두었던 감정이 봇물처럼 터졌다.
어린 나이에 진주에서 도망치듯 떠나올 때 얼마나 울었던지 더 이상 흘릴 눈물이 없을 정도였다. 그 이후에 울지 않겠다고 감정을 조절했다. 화가 나거나 속상해서 몇 번 울긴 했지만 그건 빛깔이 다른 눈물이었다. 드라마를 보거나 영화를 봐도 울지 않았다. 드라마는 드라마, 영화는 영화라는 생각을 하며 코끝이 시큰거릴 쯤에 정신을 바짝 차렸다. 울지 않겠다는 결심은 오래도록 지속됐다. 지금도 웬만해선 울지 않는다. 걸핏하면 혼이 나서 울곤 했던 어린 날의 내 모습은 없어졌다.
진주는 낯선 도시로 변해있었다. 40년을 훌쩍 넘기니 옛것은 사라지고 생소한 것으로 채워진 도시가 되었다. 아무도 나를 알아볼 리 없을 때가 되었으니 맘이 편하다. 그렇지만 나는 나를 알아야 한다.
도대체 나는 누구일까? 그걸 모른다. 내가 누구인가를 알아내는 숙제를 하려고 책상 위에 책도 펴보지 못한 채 세월이 흘러갔다.
그렇게 살아온 내 인생이 안쓰럽다. 꽃도, 나무도 뿌리가 있고 짐승도 제 어미를 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이 넓은 하늘 아래, 오로지 나 혼자뿐이라는 사실은, 내가 미물보다 못하다는 열등의식이 치밀어 오르게 했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마침내 남강을 건너 칠암동으로 향했다. 마천루가 우뚝 솟은 칠암동은 옛날 모습이 깡그리 사라졌다. 그래도 눈감고도 찾을 수 있는 2층 집, 과연 그 집이 지금까지 그대로 있으려나? 옛 건물 그대로인 곳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마치 간니가 난 잇몸에 한 두 개 젖니가 남아있는 모양새다. 앙증스러웠다.
눈앞에 칠암동, 그 옛집이 들어온다.
꿋꿋하게 옛 모습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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