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일 터쿼이즈(Pale Turquoise: 연한 청록색)
큰 어머니와 미정 엄마(언니라고 불렀다)가 내게 바라는 것은 집을 말끔하게 청소하는 일이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큰 어머니는 잠시도 쉬질 않았다. 청소가 끝나는가 싶으면 부업으로 밤 까기를 했다. 물에 젖은 밤을 잔뜩 받아와 그 껍질을 벗기고 속껍질, 율피를 칼로 깎았다. 큰 어머니는 밤을 많이 까려고 눈이 벌갰다. 집안에 세 들어 사는 사람들도 그 부업을 했다.
"야, 청희야, 밤 껍질 좀 벗겨라."
큰 어머니는 밤 껍질 벗기는 일은 내게 맡겼다. 그야말로 내겐 거친 노가다였다. 벗긴 껍질을 마대 포대에 담아 대문 바깥까지 내다 놓는 일도 내 차지였다. 그렇게 했건만 큰 어머니는, 부업 업체로부터 받은 돈을 내게 10원도 주지 않았다. 큰 어머니는 내 노동력을 착취하여 부당 수입을 올린 악덕 고용주였다. 내 손은 팅팅 불어 터지고 때로는 칼에 베일 때도 있었다. 그런 나를 안쓰러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넌 다람쥐냐? 맨날 밤 껍질만 벗기냐?"
오빠는 나를 놀리는 것인지? 안쓰러워하는 것인지? 내가 밤 껍질 벗기는 것을 힐끗힐끗 보며 말하곤 했다. 오빠에게 야속했던 때는 바로 그럴 때였다. 오빠가 나를 그 일늪에서 건져 주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아, 누가 그걸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아나 봐. 하라 하면 하고, 죽어라 하면 죽어야 하는 처지였다.
어머니는, 내가 집안 청소하거나 밤껍질 벗기는 일을 하는 것보다는 슈퍼에서 근무하는 걸 더 좋아했다. 큰 어머니와 어머니 사이에는 나를 서로 당겨가려고 눈에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큰 어머니가 우리 어머니에게 지는 편이었다. 그분들이 시키는 일은 내겐 버거웠다.
"거스름돈 잘 계산해서 내줘야 된데이. 야, 니가 제대로 하는지 걱정된다."
어머니는 내가 슈퍼 계산대에 있는 걸 좋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못 미더워했다.
"너, 혹시 삥땅칠 생각은 않제? 그랬다가는 다리몽댕이를 분질러 아예 골방에 쳐 넣어버릴 끼데이."
그렇게 하고도 남을 어머니였다. 그래서 나는 돈통에 있는 돈을 탐내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카드를 사용하지 않던 때라 현금 거래였다. 그러다 보니 계산대에서 돈 얼마를 꼬불쳐도 표나지 않을 판이었다.
아버지가 내게, 『꽃다방』김양에게 연락을 대신하게 했다. 김양은 내가 볼 때마다 껌을 씹고 있었다. 김양이 나를 싫어하지 않는 이유는, 내 입이 무겁고, 연락병 노릇을 잘해 주었기 때문이다. 김양은 때때로 포장을 뜯지 않은 팬티며 브래지어를 내게 던져주었다. 마치 동물원 원숭이에게 과자를 던져주듯이. 그럴 때면 내가 여자라는 게 싫었다. 차라리 김양이 내게 침을 뱉었더라면 그 정도로 기분이 더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김양에게 그런 나부랭이를 받는 날은 김양이 다른 남자에게 안겨 있었다. 그 장면을 아버지한테 일러바치지 말라는 은밀한 압력이었다. 김양에게 받은 속옷은 나의 비밀 창고에 감춰 두었다. 내가 입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옷이라기보다는 잠자리 날개였다. 내 속옷은 어머니가 입었던 것이나 싸구려 좌판에서 산 것이었다. 김양이 준 그물 팬티며 속이 훤히 비치는 브래지어를 어머니가 본다면 그날은 바로 내가 디지는 날이다. 내 가슴이 봉곳이 나오고 있었건만 김양이 건네준 브래지어를 해 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결국 김양이 내게 준 속옷은 그림의 떡이었다.
오빠와 한 방에서 잘 때면 나는 가슴이 너무 신경 쓰였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내 젖가슴은 티셔츠의 밋밋한 수평을 뚫고 동그란 모양을 만들었다. 혹시나 오빠의 손이 내 가슴에 닿을까 걱정되어 깊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런데 꿈속에서는 내가 오빠 품에 안겨 있거나 오빠가 나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럴 때면 내 온몸은 더워지고 땀으로 젖었다.
"야는, 자다가 무슨 땀을 이리도 흘리는지. 너도, 참 너다. 여러 가지 한다. 너, 정말~"
어머니는 내가 땀을 내는 것에 대해 못마땅한 말투로 비아냥댔다.
아침이 되면 오빠 표정을 살펴보곤 했다.
오빠는 그냥 웃기만 했다.
오빠는 나와 달리
단잠을 잔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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