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브 (Mauve: 회색빛이 도는 연보라색)
내가 청소를 먼저 시작하는 곳은 상가 2층이었다. 슈퍼 2층엔 방이 네 개 있었다. 들머리부터, 대학생 형제 자취방, 직행버스 기사 내외 방, 대학 강사 방, DJ 언니 방이었다.
첫 번째 방에는 형제가 살았다. 창휘 오빠는 그 대학생에게 과외 수업을 받았다. 대학생 방 앞과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 청소는 내 몫이었다. 대학생은 연탄재를 비우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내가 연탄재를 대야에 담아 머리에 이고 밑에다 내려놓곤 했다.
대학생은 때때로 여자를 데려왔다. 그러면 중학생 동생은 집밖으로 가방을 메고 나갔다. 형이 그러라고 협박한 듯했다. 대학생이 데려오는 여자는 번번이 달랐다. 나는 청소하다 말고 댓돌에 놓인 뾰족구두를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다. 그 뾰족구두 굽으로 벽이라도 후려치고 싶은 야릇한 맘이 훅 올라오곤 했다. 대학생은 동생 입장은 생각하지 않았다. 오는 여자들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 같았다. 동생은 찐따 바보였고, 나는 쪼다였다. 잡다한 생각이 어우러지곤 했다. 그냥 그런 모든 게 싫었다. 뭐니 뭐니 해도 나를 갈구는 큰 어머니가 제일 싫었다.
“저 대학생, 자꾸 여자를 데리고 와서 놀다가는 어느 날 시부저기 죽는 수도 있데이.”
큰 어머니가 침을 퉤퉤 뱉으며 말했다.
“왜요?”라고 내가 물었던 이유는, 새파랗게 젊은 대학생이 죽을 수 있다는 말이 생경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미정 아비나 여기 이 대학생이나... 쯧쯧, 큰일이다. 남자들이 좋다고 저러다가는 죽는 수가 있지. 사람이 너무 힘을 쓰면 안 돼. 너거 큰 아부지도 여자 밝히다가 제명대로 못살았지. 너거 아부지도 무슨 짓을 하는지 내가 다 안다. 피를 우째 속이겠노? 너거 아부지도 여자를 보믄 사족을 못 쓸 긴데... 그래도 창휘 고 놈은 좀 다를 것이야. 음, 다를 놈이야. 씨가 다르니.”
그러다가 큰 어머니는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나는 큰어머니에게서 얼른 눈을 돌렸다. 그 눈빛에 살기가 돌아 부르르 떨렸다.
“너, 언감생심 창휘를 넘보지는 않제? 아무래도 이 가시나가 창휘한테 꼬리를 친다면 우리 창휘가 그날로 넘어갈 낀데. 하늘이 두 쪽이 나도 너거는 안 된데이, 너거는 그런 사이가 아니데이, 청희야, 너 만약 창휘가 남자로 보이면 콱 죽어버려라. 아니면 야반도주로 진주를 떠나야 된데이. 알았제? 아무도 그 꼴을 볼 사람이 없데이. 알겠제?”
큰 어머니 눈총은 어머니보다 더 무서웠다. 어머니나 큰어머니 눈에는 레이저 총알을 장전하고 있었다. 그런 눈빛을 맞으면 얼얼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기겁하여 야코가 죽었다.
“너랑 나는, 일복이 터진 년이다. 아무것도 쳐다보지 말고 보지란히 일만 하믄 된데이. 내 말 무슨 말인가 알아듣겠제?”
큰 어머니는 아침부터 밤까지 일을 찾아내어 했다. 그리고 나를 도와주는 요정으로 여겼다. 그래서 큰 어머니 발소리만 들어도 내 솜털이 사르르 일어섰다.
이층 두 번째 방은 청소할 일이 거의 없었다. 정이 엄마가 깔끔하니 그 방 앞은 손댈 것도 없었다.
“쯧쯧, 똥도 버릴 것이 없는 여자가 넘의 서방을 뺏어 가지고... 죄도 많지.”
정이 엄마는 직행버스 안내원이었다. 그러다가 버스 기사인 정이 아버지와 사이에서 정이를 낳았다. 정이 아버지는 본가에서 하루를 보내고, 또 하루는 정이네로 왔다.
“이러고는 못 삽니더, 그쪽을 정리하이소. 우리 정이한테 이런 인생 물려줄 수 없습니더.” 때때로 투닥투닥 부부 싸움을 하는가 싶다가 결국은 정이 엄마가 훌쩍이곤 했다. 그러면 정이아버지는 슈퍼에 내려와 부라보콘을 사들고 올라갔다. 잠시 후에 정이와 정이 엄마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그 방에 불이 꺼졌다.
정이 엄마의 삶은 회색빛인 듯했다.
그래도 정이 엄마의 사랑은
회색빛이 도는
연보라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대문 파스텔화(ⓒ정필)
#칠암동
#2층상가
#슈퍼2층
#회색빛이_도는_연보라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