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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곳에 가을이 당도하였으매*

- 경주빵

by Cha향기
IE003551683_STD.jpg ▲ 경주빵


일부러 그렇게 날을 잡은 건 아닌데 우린 APEC(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 회의가 끝난 지 보름 후, 경주에서 모였다. APEC이 열린다는 것도 모를 때 미리 예약해 둔 것이 신의 한 수였다. 뿔뿔이 흩어져 지냈던 여고 동창생 5명이 만났다. 우린 50년 지기 친구다.


여고 동창생이란 잘 난 척해 봤자 거기서 거기요, 못난 척해도 그렇지 않다는 것 다 아는 사이다. 50년이란 세월은 숫자에 불과했다. 만나면 여고 때 이야기로 꽃을 피운다. 각자 삶 속 이야기가 참 다양하다. 각자의 삶을 들여다보니 걱정 없는 가정이 없었다. 다섯 빛깔 걱정을 저마다 걱정 인형처럼 안고 있는 우리였지만, 친구들 앞에서는 감출 것이 없었다. 그리고 친구들이 별 말을 하지 않아도 우린 서로의 얼굴에서 서로서로 위로받고 있었다. 친구란 그런 거였다.


"우린, 친구 아이가?"


그 말속에 스민 의미를 여고 동창생들과 해후하면서 새삼 알게 됐다. 여고를 졸업한 후 볼링핀 흩어지듯 우린 각자의 삶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민들레 갓털 흩날리듯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다가 서로의 연락처를 우여곡절 끝에 알아내어 단체대화방이 만들어졌다. 우리의 해후는 거의 이산가족 상봉 수준이었다. 저마다 사회에서 한 자리씩 하며 각자의 자리를 지킨 친구들이었다. 그런데 9명 친구 중 1박 2일 모임에 참석하는 친구는 겨우 5명이었다. 일상에 매여 쉽게 시간을 낼 수 없는 친구들이 있었다.


지난해 첫 모임을 경주의 한 리조트에서 가졌다. 두 번째 모임은 거제에서 가졌다. 해마다 두 차례씩 만나자고 했다. 나는 수도권에 살기 때문에 모임에 참석한다는 게 쉽지 않았다. 다른 친구들은 대부분 부산, 진주 울산 등지에 살고 있다. 이런 모임이 아닐지라도 서로 가까이 살고 있으니 자기들끼리는 종종 만나기도 한단다.


처음부터 경주를 약속 장소로 정한 건 순전히 나 때문이었다. KTX로 내려가면 그다지 먼 곳이 아니다. 나 외에 다른 친구들은 차를 몰고 왔다. 한 친구는 세 번 다 KTX 역에 나를 데리러 오고 또 헤어질 때 다시 역까지 보내주곤 한다. 첫 모임 때보다 이번에 경주 가는 길이 설렌 이유는 APEC 회의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IE003551687_STD.jpg ▲ 가을 들녘(달리는 KTX 안에서 찍음)


KTX 열차 안에 앉으니 비로소 모든 일상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집 밖으로만 나와도 내겐 '힐링'이었다. 그게 여행의 묘미였다. 가을이 영글어가는 정도를 집안에서는 알 수 없다. 열차 안에서 내다보는 가을 들녘은 낭만적인 감성으로 젖어들게 했다. 가을 들판을 보니 20대에 읽었던 시가 새록새록 생각났다.


곳곳에 가을이 당도하였으매

지난여름은
줄곧 난행(亂行)만 당하고
겨우 한 줄의 시(詩)를 써서
수습(收拾)하고
곳곳에 가을이 당도하였으매
장구 소리 풍악 소리 드높사오나
빈자(貧者)로다, 빈자(貧者)로다(정진규 시에서 발췌)


드디어 경주역에 도착하니 APEC이라는 굴지의 행사를 치른 흔적이 남아 있었다. 역사 안을 둘러보고 경주빵 파는 곳이 있는지 미리 확인해 두었다. 매스컴을 통하여, 이번에 경주빵이 불티났다는 말을 들었다. 인터넷으로 경주빵을 살 수도 있지만 그래도 경주를 다녀가는 마당이니 꼭 경주에서 경주빵을 사고 싶었다.


IE003551688_STD.jpg ▲ APEC 현수막(경주에서)

숙소는 1년 전에 봤을 때보다 훨씬 업그레이드되어 있었다. 커다란 국제 모임을 유치하느라 최선을 다하여 리모델링 한 모양이었다. 숙소에서 바라보는 보문 호수 풍경은 절경이었다.


저녁 식사를 하러 호숫가에 있는 맛집 레스토랑으로 갔다. 내가 한 턱 냈다.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활동을 하게 됐다는 기념으로... 쌓인 얘기를 밤늦게까지 나누다가 이튿날 불국사로 향했다. 불국사는 중학교 수학여행 때 가본 후에 이제야 다시 가게 됐다. 기억이 거의 나지 않았지만, 그때와 완전히 딴 판이었다. 과연,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될 만했다.


한두 해 가꾸어 만들어 낼 풍경이 아니었다. 수많은 풍파와 세월 속에서 단단히 빚어진 불국사의 가을 풍경은 절경 중의 절경이었다. 그 근처에 있는 카페도 인상적이었다. 산속에 있는 카페지만 자갈로 바닥을 깔고 물을 채우니 근사한 풍경이 나왔다. 뷰맛집이었다. 물과 산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명소였다. 요즘은 검색하면 식당이든 카페든 쉽게 찾아갈 수 있으니 참 살기 좋은 세상이다.

IE003551691_STD.jpg ▲ 불국사 주변 단풍과 카페에서 찍은 풍경


여전히 외국인 관광객이 많이 보였다. 'K팝데몬헌터스(케데헌)'의 인기도 편승했을 것 같았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으로 자리매김하는 중이다. K문화, K푸드가 이젠 외국인들에게 최고 인기다.


그래서 경주빵도 인기 절정에 올랐다고 한다. 1박 2일 여행을 마무리하며 돌아오는 경주역에서 요즘 그렇게 인기 많다는 경주빵을 샀다. 여러 가지 다른 빵은 이미 동이 났고 찰보리빵만 몇 통 남아 있었다. 자칫 경주에 갔다가 경주빵을 사지 못하고 올 뻔했다.


우린 내년 6월, 진주에서 다시 모이기로 했다.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먼 데서 친구가 있어 찾아오면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옛 글귀가 새삼 맘에 닿았다.



* 글 제목은 정진규 시(詩) 제목을 인용함.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185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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