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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텐락에 담긴 사랑

- 잣죽

by Cha향기

냉동실에 쟁여둔 잣이 있었다. 언제, 누군가에게 받은 것인지 기억이 가물거린다. 잣죽을 끓일 일이 없어서 차일피일 미루었다. 그러다가 어제는 날 잡아, 가을맞이로 잣죽을 끓였다. 쌀을 물에 담가 불리고 잣도 꺼냈다. 레시피를 찬찬히 보며 난생처음 잣죽을 끓였다.


실로 오랜만에 먹어보는 잣죽이다. 입안 가득 고소한 잣 향을 머금고 있으니 잣죽에 얽힌 일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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잣죽 끓이기 레시피


- 쌀을 깨끗이 씻어 30분 이상 물에 불린다.

- 잣은 전자레인지에 1~2분 돌려 수분 제거 후 물 1컵과 함께 믹서에 곱게 간다.

- 불린 쌀과 물 2~3컵을 넣고 갈아준다.

- 냄비에 간 쌀과 물을 넣고 중불에서 저어가며 끓인다.

- 쌀이 퍼지면 갈아둔 잣을 넣고 저어가며 끓인다. 이때 바닥에 눌지 않도록 나무주걱으로 젓는다.

- 소금으로 간을 맞춘다.




아들은 바야흐로 병상 14년째로 접어들고 있다. 2012년 11월, 이맘때쯤이었다. 대학 3학년이었던 아들이 학교 캠퍼스에서 자전거에 넘어졌다. 한낱 자전거 사고이려니 했는데 아들은 삶과 죽음의 경계선까지 가고 말았다. 생명은 간신히 건졌지만, 며칠 후에 수술 후유증으로 위험한 고비가 왔다. 부랴부랴 앰뷸런스에 아들을 태우고, 포항에서 서울에 있는 병원으로 올라왔다. 그 병원에 김 과장님(아들 동아리 친구, 진서* 아버지)이 근무하고 있었다.


아들은 중환자실에서 집중 치료를 받으며 안정을 취했다. 우리는 면회 시간이 되면 조금이라도 아들을 더 보려고 중환자실로 부리나케 들어가곤 했다. 그럴 때마다 간호사가 우리에게 말했다.


“김 과장님이 좀 전에 다녀가셨어요. ‘우리 딸 남자 친구니 잘 부탁해요.’라며...”

“그러셨군요. 감사하네요.”

김 과장님은 우리 아들을 틈틈이 들여다보셨던 것이다. 드러내지 않는 사랑 앞에 고개가 숙여졌다.




아들 사고 이후에, 남편은 몇 개월 동안, 걸핏하면 눈물을 흘렸다. 그뿐만 아니라 세 번이나 혼절했다. 그중 한 번은, 병원에서 남편이 정신을 잃었던 적이 있다. 병원 내에서 쓰러지니 119에 연락할 수 도 없는 노릇이라 막막했다. 급한 맘에 김 과장님에게 연락했다. 그랬더니 우리가 어디 있는지 상세히 물은 후에 그곳으로 이송팀을 보내주셨다. 이송팀이 신속하게 남편을 응급실로 이송했다. 그래서 남편은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알고 보면 김 과장님은 우리 남편을 살린 생명의 은인이다. 아무튼, 남편은 응급실에, 아들은 중환자실에 있었던 때가 있었다. 그야말로 내겐 백척간두였다.


그러니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에 먹고 싶은 게 없었다. 그러니 살이 쑥쑥 빠졌다. 바지가 자꾸만 흘러내렸다. 해본 적 없었던 바지 벨트를 매야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진서가 스텐락에 담은 잣죽을 들고 왔다.


“엄마가 끓이셨어요. 드시고 힘내세요.”


진서에게 건네받은 잣죽은 여전히 따끈했다. 플라스틱 통 대신에 스텐락에 잣죽을 담아 보내신 진서 어머니의 깨알 같은 정성이 느껴졌다. 우리는 그 잣죽을 먹고 입맛을 되찾았다. 잣죽을 먹는데 감사함에 목이 메었다. 본 적 없는 우리에게 잣죽을 끓여 보내시다니... 그렇게 사는 분도 있었다.


잣죽을 끓이려면 쌀을 미리 불려 놔야 하고 불린 쌀을 잣과 함께 믹서에 갈아야 한다. 믹서기는 물론 여러 종류 그릇이 나와야 한다. 죽을 끓이는 일은 생각보다 번잡하다. 옆에 서서 나무 주걱으로 하염없이 저어주며 뭉근히 기다려야 한다. 아마도 진서 어머니는 쌀을 불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 가정을 위해 기도했을 것이다. 기도하는 맘으로 죽을 끓였을 것 같다.


진서 어머니는 약국을 운영하는 약사다. 그러니 새벽부터 일어나 잣죽을 끓인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 후로도 진서는 몇 번이나 잣죽을 들고 왔다.


병원 규정상 대학병원 재활의학과 입원은 4주간만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병원 노매드 신세가 되어 병원을 옮겨 다녔다. 진서는 옮기는 병원마다 꼭 찾아왔다. 그런 진서를 맞이할 때마다 우리에겐 큰 위로가 됐다.


아들은 재활 치료로 경사 침대에 매달려 서 있곤 했다. 그럴 때면 병문안 온 진서는, “오빠, 오빠!”라고 하면서 우리 아들을 올려다보며 쫑알쫑알 얘기했다. 학교생활할 때 있었던 얘기를 했다. 그렇지만 인지 없는 아들은 벽창호일 뿐이었다. 아, 한마디라도 대답 좀 해주지.


진서는 몇 개월 치, 아르바이트했던 돈을 모아 우리 아들 병원비로 내놓기도 했다. 그 힘든 여정 가운데서 진서 가족을 만난 것은 우리에겐 축복이었다. 어려운 자를 소리 없이 돌아보는 진서 가족들에게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배웠다. 힘든 이웃을 돌아보는 선한 이웃을 만났다. 이웃에게 손을 내밀어야 한다는 것을 진서 가족을 만나면서 알게 됐다. 비싼 수업료를 치르고 실행활에서 배우는 인생학 개론 실천 편 같은 것이었다.


한순간 사고로, 아들은 14년째 세미 코마 상태로 병상에 누워있지만, 아들 덕분에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그만큼 삶의 폭이 넓어졌다. 이런 아이러니라니... 아들이 병상에 누워있으면서 부모 인생을 돌리고 있는 듯하다.


아들 녀석이 우리 인생에
다양한 인생 풍경화를 그려주고 있다.


*진서: 가명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18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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