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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물이 솟는다! 퐁퐁퐁

- 삶은 땅콩

by Cha향기

생각지도 않은 땅콩을 받았다. 지인이 시골에서 샀다며 내게 나눔 했다. 득템이다. 난 삶은 땅콩 킬러다. 삶은 땅콩은 일 년 내내, 삼시세끼 먹어도 질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건 언제 먹어도 좋다. 그에 비해, 볶은 땅콩은 싫다. 볶은 것은 고소해서 하나만 먹어도 질린다. 오랜만에 삶은 땅콩을 까먹노라니, 깡그리 잊고 지냈던 고향 친구, 윤조 생각이 났다.


고향 마을엔 40호 남짓 살았다. 웃담, 중담, 아랫담으로 나뉘었다. 웃담에 살았던 나는, 아침마다 윤조 집에 들렀다. 윤조는 중담에 살았다. 진수네 집 있는데서 골목을 접어들어 명자네 집을 지나면 약간 언덕진 길이 이어졌다. 그 골목 끄트머리에 윤조네 집이 있었다. 윤조네는 그 골목 막창이었다. 윤조네 집 뒤에는 사시사철 푸른 대나무가 바람에 일렁이고 있었다. 윤조네 마당 왼편에는 가죽나무가 있었다. 집안에 들어서면 마을 앞 들녘이 훤히 보였다. 말하자면 뷰가 좋은 집이었다.


윤조네 아침식사는 간단했다. 밥상이 없었다. 각자 앞에 놓인 밥공기 하나에 손에 쥐고 있는 숟가락이 전부였다. 늘 시래기 된장국에 꽁당 보리밥을 말아서 먹었다. 여섯 명이 밥그릇을 들고 게걸스럽게 먹어댔다. 게다가 어린 남동생 둘은 아랫도리에 아무것도 입지 않고 밥그릇을 사타구니 앞에 놓고 밥을 퍼먹었다. 숟갈을 내려놓고 밥공기에 남은 국물을 쪽쪽 마시면 아침 식사 끝이었다. 아무도 식후에 이를 닦지 않았다. 곧바로 가방 들고 학교로 나섰다.


다리가 통통했던 윤조는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집을 나서면서부터, '샘물이 솟는다 퐁퐁퐁, 낮이나 밤이나 퐁퐁퐁, 길가는 나그네들 목 축여 가라고 산비탈 돌틈에서 퐁퐁퐁'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노래가 끝날 즈음이면 랙에 걸린 듯이 연신 '퐁퐁퐁'을 연발했다. 그럴 때마다 양말을 신지 않은 윤조 고무신에서 뽕뽕거렸고 윤조의 엉덩이에서도 뽕뽕거리는 소리가 났다. 학교에 도착할 때까지 윤조는 '샘물이 솟는다 퐁퐁퐁'을 여러 차례 불러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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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시래깃국에 밥 말아먹은 윤조는 방귀쟁이였다. 윤조는 공기놀이나 딱지치기, 구슬 치기도 엄청 잘했다. 윤조가 오동통한 손으로 구슬을 구덩이에 정확하게 넣었다. 구슬치기 하면서도 윤조는 틈틈이 뽕뽕거렸다. 딱지치기할 때, 윤조가 발을 딱지 옆에 갖다 대고 힘껏 내리치면 다른 딱지가 훌러덩 뒤집혔다. 그럴 때도 윤조는 뽕뽕거렸다. 윤조는 고무줄놀이도 잘했다. 윤조를 당해낼 자가 없었다.


삼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보며

유관순 누나를 생각합니다

옥 속에 갇혀서도 만세 부르다

푸른 하늘 그리며 숨이 졌대요


윤조는 끝까지 살아남아 고무줄놀이에서 퀸이 되곤 했다. 우리는 신이 나서 손뼉을 치며 '유관순 노래'를 불렀다. 윤조는 놀이에서 단연 인기가 있었거니와 땅콩으로 우리의 애간장을 녹게 했다.


윤조 뒤란에는 조그마한 밭이 있었다. 거기에 땅콩을 심었다. 콩이 땅속에 있다니. 윤조는 때때로 주머니에 땅콩을 넣어 다녔다. 길 가다가 그 땅콩을 한 알씩 까먹곤 했다. 그 맛이 궁금했다. 메주콩만 콩인 줄 알았던 내게, 땅콩은 신문물 같은 것이었다. 콩은 생으로 먹을 수 없는 법인데 어째서 윤조는 땅콩을 생으로 먹는 것일까? 언젠가 윤조에게 땅콩을 얻어먹었다. 비린내 때문에 먹을 수 없는 메주콩이나 완두콩과는 달랐다. 땅콩은 생으로도 먹을 만했다. 은근 중독성이 있는 맛이었다. 먹고도 또 먹고 싶었다.


가을 소풍 때였다. 윤조는 삶은 땅콩을 보자기로 만든 주머니에 가득 담아 왔다. 그때 우리는 윤조 곁에 삥 둘러 서서 땅콩을 얻어먹으려고 안달이었다. 아침마다 윤조 집에 들르는 나는 다른 애들에 비해 좀 더 많이 받았다. 아, 바로 그 맛이었다. 삶은 땅콩은 달거나 고소하지 않았다.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는 맛이었다. 그 맛을 표현할 단어가 없다. 삶은 땅콩은 절대적인 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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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땅콩을 삶고 있다./ 삶은 후에 한 김 식히기]


윤조 언니는 점조였다. 교복을 입으면 하얀 얼굴이 더욱 빛났다. 점조 언니가 교복을 입고 가방을 든 채 학교 가는 모습은 천둥벌거숭이처럼 뛰어다니는 윤조와는 사뭇 달랐다. 윤조에게는 쌍둥이 동생이 있었다. 주야와 구야였다.


어느 날 오후였다. 비가 온종일 내리더니 잠시 멈췄다. 쌍무지개가 앞산에 떴다. 우리는 무지개를 보며 까르르 웃었다. 조무래기들은 무지개를 잡겠다며 앞산으로 향했다. 도랑을 건너야 했는데 물이 잔뜩 불어나 있었다.


"우리 건너가 볼까?" 누군가 말했다.

"안돼." 더러는 안된다며 말렸다.


조무래기들은 장난을 치며 그 황토물에 발을 적셨다. 그때 주야가 발을 헛디뎠다. 솔악골에서 내려오는 물과 묵촌에서 내려오는 물이 합세하는 곳이었다. 거긴 소용돌이치는 곳이라 평소에도 물살이 센 곳이었다. 주야는 황토물에 순식간에 빠지고 말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주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주야를 덮친 황토물은 급히 아래쪽으로 내달렸다. 물 속도가 다소 줄어드는 정대리, 조랭이 마을까지 가봤지만 주야를 찾지 못했다고 했다. 그날 마을 사람들은 거의 저녁을 먹지 못했다. 그냥 덜덜 떨었다. 끝내 주야를 찾지 못했다.


윤조네 가족들은 그때부터 웃지 않았다. 그리고 그 해, 윤조네는 마을을 떠났다. 그해, 윤조네는 땅콩을 캐지도 않은 채 땅콩밭을 그대로 두고 떠났다. 도저히 고향에서 살 자신이 없다고 했단다. 숙희네가 대나무밭까지 다 합쳐서 그 집을 샀다.


몇십 년이 지난 후에 윤조 소식을 얼핏 들었다. 유흥 주점을 한다는 소릴 들었다. 윤조의 삶이 평탄하지 않다는 소리도 들렸다.


윤조를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윤조생각을 하며 먹는
삶은 땅콩이 자꾸만 목에 걸렸다.





땅콩 삶기 레시피(지인에게 받은 땅콩을 삶았다.)


- 이물질이 제거될 때까지 땅콩을 여러 번 씻는다.

- 냄비에 세척한 땅콩을 넣고, 땅콩이 충분히 잠길 정도로 물을 붓는다 (땅콩 양의 약 2배)

- 굵은소금 1/2~1큰술을 넣는다

- 센 불에서 끓이다가 물이 끓기 시작하면 중불 또는 중 약불로 줄여 뚜껑을 덮고 약 20분간 삶는다.

- 중간에 간간이 저어준다

- 불을 끈 후 뚜껑을 덮은 채로 5분 정도 뜸을 들인다.

- 물기를 제거한 후에 한 김 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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