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담 May 04. 2023

뉴요커의 진짜로 달리는 "런"웨이 패션

D-186 뉴요커의 달리기 패션 사정

뉴욕은 왠지 모르게 "패션"의 도시라는 이미지가 있다. 

나는 패션계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정도를 넘어서 패션 테러범에 가깝기 때문에 자세한 이유는 잘 모르지만, 어쨌든 패션 문외한인 나조차도 11년 전에 처음 뉴욕으로 건너올 때 그곳이 패션으로 유명한 곳이라는 것 정도는 알았다.



그런데 막상 살아보면, (아니 한 일주일 여행만 해봐도?) 인스타그램에 나오는 것 같은 패셔너블한 사람은 가뭄에 콩 나듯 있을까 말 까다. 특히 그런 동네에 잘 안 가는 생활패턴이라 더 그런지는 몰라도, 하여간 전반적으로 서울사람들이 훨씬 더 잘 입고 다녔으면 다녔지 "뉴요커들은 패셔너블하다"는 말은 여전히 글쎄올시다....



달리기도 그렇다. 인스타그램에 한글로 나이키런 해쉬태그만 검색해도 나이키 화보인가 싶게 잘 차려입은 러너들이 빼곡하다. 그런데 내가 달리기를 3년 동안 하면서 길에서 스쳐 지나간 그 수많은 러너들을 떠올려보면... 글쎄올시다.





뉴욕에서 아침에 달리기를 하러 나가면

일단 상의는 10명 중 9명은 기념티셔츠를 입고 있다. 러너라면 대회를 일 년에 몇 번은 뛰게 마련이고, 대회를 나가면 티셔츠는 무조건 준다. 그 티셔츠가 집에 넘쳐난다. 나는 작년에 대회를 11번 뛰어서 티셔츠가 한 9개, 딱 한번 기념품이 티셔츠가 아닌 반바지로 나온 적이 있었고, 모자를 받은 대회가 한번 있었다. 이 정도로 넘쳐나는 데다가 아주 얇은 테크 셔츠라서 달리기 할 때 말고는 딱히 입을 일도 없으니 무조건 달리기 할 땐 기념티를 입는다.



10명 중 나머지 1명, 기념 티셔츠를 안 입은 사람은 아직 대회를 안 뛰어봤거나, 빨래가 엄청나게 밀린 사람임에 틀림없다.



거기에 겨울에는 바스락거리는 얇은 점퍼, 즉 윈드브레이커를 입는데 대부분 마라톤 대회 피니셔 재킷이 많다. 나는 무슨무슨 마라톤 피니셔라고 써진 윈드브레이커는 마라톤을 완주하면 메달이랑 같이 주는 건 줄 알았는데, 대회 전날 배번을 받으면서 자기가 사는 거였다! (그리고 진짜 비싸다) 

문제는 피니셔 재킷을 먼저 사고 대회는 다음날뛰는 거라서, 간혹 드물긴 해도 피니셔 재킷은 샀지만 피니쉬를 하지 못하는 불상사가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이는 42.195km 코스를 달리는 내내 '피니셔 재킷 벌써 샀으니 기권할 수 없다'를 되뇌며 뛰었다고...


이 윈드브레이커도 운이 좋으면 공짜로 받는 수가 있다. 바로 동절기에 달리기 대회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윈드브레이커는 단벌이건 말건 겨우내 입는다. 



기념티셔츠나 자원봉사자 재킷을 입고 다니는 이유는 진짜 집에 넘쳐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입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과 스몰토크를 시작할 수 있는 좋은 건수가 되기 때문이다. 미국사람들은 (특히 뉴욕사람들은) 굉장히 수다스럽다. 뭐라도 말을 하고 싶어 늘 안달이 나있다. 그럴 때 자기가 아는 대회의 기념티셔츠 입은 사람이 지나간다? 이건 백발백중이다.

나는 자원봉사자 재킷을 입고 뛰는데, 작년에 그 대회를 뛰었던 러너들이 많이 말을 걸고 짧게나마 기분 좋게 대화를 나누곤 한다.




하의는, 겨울에는 긴바지 레깅스를 입는다. 

색깔은 또 열에 아홉은 검은색이다. 얼평 몸평 하지 않아요, 남의 눈 신경 쓰지 않아요 마인드의 미국인지라 레깅스든 크롭탑이든 남의 눈 신경 쓰지 않고 누구나 입는다. 하지만 아무리 미국이어도 남의눈을 신경 쓰는 부분이 있긴 있는데 땀자국에는 조금 예민하다. 왜냐면 레깅스를 입고 뛰다 땀자국이 나면, 정말 오줌 지린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 게다가 레깅스 색깔이 빨간색이거나 갈색이다..? 그러면 진짜 알면서 봐도 피를 철철 흘리는 걸로 보인다. 

그래서 레깅스는 땀자국이 안 보이는 검은색이 가장 인기가 많고, 조금 변화를 주고 싶으면 남색, 정 밝은 색이 입고 싶다면 아예 현란한 무늬가 있어서 땀자국은 커녕 유심히 봤다간 눈이 돌아가버릴 것만 같은 그런 레깅스를 입는다.



남자들은 둘로 나뉜다. 얼어 죽어도 반바지 (얼죽반) 파와 레깅스파가 있다. 사실 뉴욕은 겨울이 길어서 문제지 한겨울 가장 추운 시기에도 서울처럼 뼈를 바르고 살을 에일만큼 춥진 않아서 반바지도 입으면 입을 만도 하다. 



거기에 또 어디서 기념으로 받은 털모자 (주로 땡스기빙 데이에 전국 각지에서 열리는 "터키트롯"이라는 대회 기념 털모자)까지 써주면 국룰 겨울 러닝 패션 완성이다.




여름이 되면 여자든 남자든 반바지를 입는다. 

그런데 이 반바지가 묘하게 중요한 거라서, 목에 칼이 들어와도 팔랑이는 반바지 (목칼팔?), 누가 뭐래도 숏레깅스 (누뭐숏?) 으로 나뉜다. 당연히 숏레깅스는 땀자국 때문에 블랙이 거의 대부분이다. 

팔랑거리는 반바지는 땀자국이 나지 않기 때문에 색깔을 다양하게 선택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까딱 잘못 골랐다가 굉장히 숏다리로 보이는 문제가 있다. 

그리고 여름에도 상의는 당연히 기념티셔츠다. 



뭐 어쨌거나 평일 아침 공원에 나가면 대강 저런 옷을 입은, (검은 하의에 목 늘어난 기념티, 쌩얼에 자고 일어난 머리 그대로 모자나 하나 쓴) 친근한 사람들이 친근하게 뛰고 있다. 나이키 런클럽 해쉬태그에 나오는 것 같은 상하의를 깔맞춤으로 입고 긴 생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어 한가닥 한가닥이 살랑거리게 뛰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 




여기에서 치명적인 포인트는 

검은 긴바지 레깅스에 단벌 윈드브레이커 (속에는 뭘 입었는지 알 수 없는) 겨울 달리기 패션을 근 7개월은 입어야 된다는 점이다. 



한국은 벚꽃도 피었다가 다 지고, 완연한 봄과 초여름의 사이라고 하는 5월이건만, 뉴욕은 여전히 아침에는 롱패딩을 입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춥다. 새벽 일찍 달리는 러너들은 더더욱 추우니 저놈의 긴바지 기모 레깅스와 윈드브레이커를 벗을 수가 없다. 단벌이나 진배없는 겨울 달리기 복장에 질리고 물리고 넌덜머리가 날 때쯤이나 되어야 겨울이 끝난다. 



그리고 중간이라는 건 아예 없다는 듯이 여름이 훅 치고 들어오는 것이다. 그러면 어제까지 입었던 콜드기어를 벗고, 갑자기 반바지에 싱글렛을 입고 나간다. 반바지를 입는 첫날의 그 생소하고 허전하지만 홀가분한 기분! 


뉴욕 러너들의 5월은 그 기분을 학수고대하며 오늘이 마지막이다, 콜드기어 오늘이 마지막이다 하는 마음으로 한 열 번 정도는 입는... 그런 계절인 것이다.......





*참고

뉴욕에서 겨울용 달리기 복장은 뉴욕시티마라톤부터 브루클린 하프마라톤까지입니다. 기억하세요.

뉴욕시티마라톤부터, 브루클린 하프까지....



인간적으로 너무 길다 겨울~~~~~~

매거진의 이전글 밀당의 고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