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정신과 실패 후 신체화 증상이 나타났다
동네 맘카페에서 불면증 약을 잘 처방해 준다고 유명한 동네 작은 정신과 의원에 갔다. 진료실에는 나이 지긋한 남성이 앉아있었다. 그는 내 검사 차트를 보고 있었다.
"많이 불안하신가봐요? 이정도면 불안장애인데"
"밤에 악몽을 많이 꿉니다."
"그런데 왜 자꾸 불안한 생각을 하시는 거죠?"
대화가 사선으로 자꾸 삐져나갔다. '불안장애'인 것 같다는 나에게 그는 왜 불안한 생각을 자꾸 하느냐고 되물었다. 진료실에서 내가 말할 수 있는 시간은 1분정도였고 나머지 20분은 중년 남성 의사의 설교였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실제로 그 의사는 목회상담을 전문으로 하는 목사이기도 했다. 그는 나에게 신앙수련이나 영적치료 등을 권했다.
그 앞에서 차마 어린시절 목사에게 당했던 성폭력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못했다. (이 이야기는 다음번에 자세히) 시간과 돈이 너무아까웠지만 처방받은 항우울제와 항불안제, 신경안정제가 얼마간의 도움이 되었기에 몇 번 더 다니다가 진료실에 앉아있는 걸 견딜 수가 없어 치료를 중단했다.
약을 중단한 이후 정체모를 가슴통증과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과 이명으로 시달렸다. 증세가 심해지면서 덜컥 겁이났다. 죽을 병에 걸린 것은 아닐까, 뇌종양이 아닐까 별의별 불안과 공포가 일상을 잠식했다. 대학병원 내과와 신경과, 이비인후과를 전전했다. 약 3개월간 심전도와 심장초음파, MRI와 CT, 전정기관검사, 이석증 판별 검사 등 할 수 있는 검사를 다 받았다. 백만원이 훌쩍 넘는 검사비를 울며겨자먹기로 냈는데 모든 검사의 소견은 '정상'이었다. 허망했다. 담당의는 신경증적 증상일 수 있으니 정신과를 찾아가보라고 했다.
병원을 이곳저곳 들낙거리게 했던 정체모를 증상들이 결국은 신체화 증상이라는 걸 어쩔 수 없이 인정하고 나자 악몽의 주기가 더 강해졌다. 매일 한번 깨면 다행이고 많을 땐 한 밤에 7번의 악몽을 꾸고 깨기를 반복했다. 결국 지역 내 큰 병원의 정신과를 방문했다. 익숙한 검사지들이지만 처음 마주하듯 몸에 긴장이 들어간 채로 검사를 받았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의사를 만났다. 그간 참 많이도 설명해왔던 내 증상들. 설명의 횟수만큼이나 납득시키지 못한 것만 같은 무력감도 켜켜이 쌓여있던 나는 뭐라 입을 떼야 할지 머릿속이 하얘졌다.
다행이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듣던 의사는 악몽장애는 수면장애를 치료하는 보통의 약물만으로는 치료가 매우 어려운 종류의 것이라 말했다. 게다가 이전 병원서 진단받은 PTSD. 범불안장애까지. 당장의 효과를 바라기보다는 일단 가장 불편함을 초래하는 수면문제부터 차근차근 대증적으로 풀어가보자고 했다. 의사는 나의 수면주기와 증상에 대해 세세하게 설명했다.
특히 나는 렘수면이 비정상적으로 길고, 비렘수면이 발견되지 않는 수면패턴을 보인다고 했다. 일반 불면증과 달리 수면제가 효과가 있지는 않을 것이고 신경안정제와 렘수면을 줄여주는 약물을 써보기로 했다. 하지만 이 약들도 결과적으로 수면의 질을 향상시키지는 못한다는 점, 수면제나 신경안정제는 도리어 비렘수면을 방해하는 부작용도 있어 약물만으로는 근본적인 치료는 어렵다는 점도 담담하게 설명했다.
조금은 건조하지만 의학적으로 자세한 설명과 앞으로의 치료계획에 대해 과하지않게 접근하는 것이 도리어 안정감을 줬다. 길게 봐야 한다는데, 사실 조급한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다. 내 증상에 대해 치료가 될거라는 희망이 별로 없는 채로 긴 시간이 지났다. 근데 플라시보 효과라는 말도 있듯이, 내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이 어쩌면 맞을지도 모르겠어서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아볼 뿐. 그 날 일기장에 "더이상 꿈꾸고 싶지 않다"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