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시선으로부터, 우리가 받은 것들

[독서노트] 정세랑, 《시선으로부터,》

by 고유 Aug 31. 2022


자신이 죽거든 절대로 제사를 지내지 말라고 단언한 심시선 여사의 10주기에 큰 딸 명혜가 제사를 지내야겠다고 가족들에게 선언한다. 단 한번 뿐인 제사를 지내기 위해 시선의 가족들은 그녀가 젊은 시절을 보낸 하와이로 떠난다.


시선을 둘러싼 시선(視線)과 시선이 만든 시선(視線)


전쟁 당시 집단학살, 타국에서 아시아계 여성으로 받은 차별, 남성 권력의 폭력으로 무참히 짓밟혔던 시선의 젊은 날. 한국으로 돌아와 미술가이자 문필가로 명망을 얻은 시선이지만 여전히 선정적인 가십 거리로 그녀를 소비하는 세상. 이 소설은 현대사의 비극과 이 시대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 세계의 부조리를 관통하며 나아간다.


파격적인 행보와 과격할 정도로 진보적인 발언으로 늘 소문과 분쟁에 휩싸였던 시선은 사실 무르고, 슬프고, 약한 이들을 깊은 공감으로 품을 줄 알았던 사람이다.


나는 단단히 마음 먹고선, 어찌 살아남았나 싶을 정도로 공격성이 없는 사람들로 주변을 채웠다···야생에서라면 도태되었을 무른 사람들이었기에 그들을 사랑했다. 그 무름을. 순정함을. 슬픔을. 유약함을



시선으로부터,


이 소설은 제목 뒤에 쉼표가 있다. 이 쉼표가 데려오는 것은 무엇일까.


십 주기니까 딱 한 번만 지낼 건데, 고리타분하게 제사상을 차리거나 하진 않을 거고요. 각자 그때까지 하와이를 여행하며 기뻤던 순간, 이걸 보기 위해 살아 있었구나 싶게 인상 깊었던 순간을 수집해 오기로 하는 거예요.


이 소설의 중심에는 ‘제사’가 있다. 여성들이 꼭두새벽 일어나 차례 음식을 준비하면 직계 남성들이 제를 올리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시선의 가족들은 ‘가장 의미 있는 물건’을 찾아 오기로 하고 각자의 시간을 보낸다. 각기 다른 기억과 방식으로 시선과 연결되어있는 그들은 그녀에게 선물할 물건과 추억을 찾으며 10년 전 갑작스레 떠나보낸 시선을 기억 속에서 다시금 소환한다.



시선으로부터, 뻗어나온 가족


시선은 독일인 스승의 폭력으로부터, 그리고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던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살아남았다. 그러한 시선이 남긴 글을 통해 자신에게 힘을 얻는 것이 바로 피해 생존자 화수다. 화수는 협력업체 사장이 자행한 염산 테러를 당한 이후 세상의 일그러지고 오염된 면을 설명할 언어를 찾으려 힘쓴다. 그런 그녀는 책을 매개로 한 시선과의 대화를 통해 천천히 자신의 삶을 회복해간다.


어린 시절 큰 병을 앓았던 손녀 우윤은 와이키키 해변에서 여러 번의 실패 끝에 서핑에 성공한다. 바다에서 파도를 타며 순간적으로 경험한 ‘자유’를 그녀는 제사상에 가져온다. 아프다는 이유로 늘 따라오던 삶에 대한 제한들에 그녀는 자유를 버팀목 삼아 맞설 힘을 얻는다.


우윤이는 약해 보이지만 시선으로부터 뻗어나왔지. 지지 않고 꺾이지 않을 거야. 그걸로 충분할거야.



시선으로부터, 다시 세상으로


시선을 통해 자신이 겪은 ‘죽음’을 애도하고, 삶을 나아갈 힘을 발견하는 과정은 일종의 통과의례와도 같다. 죽음을 맞닥뜨리고 그의 삶을 둘러싼 비극을 마주하는 일은 고통스럽지만, 이전과는 다른 삶의 시작점에 나를 서게 하는 통과의례.


이 소설은 영화감독 김보라의 추천사 처럼 “가부장제에 포섭되지 않은 여성이 가장이 될 때, 가족들이 어떠한 결을 갖고 살아갈지에 대한 기분좋은 전망을 준다.”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살아남은 시선과, 그녀의 이야기로부터 살아갈 힘을 얻는 이들의 이야기는 이 시대의 억압과 폭력으로부터 살아남은 피해 생존자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서로의 힘이 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우리는 추악한 시대를 살면서도 매일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던 그 사람을 닮았으니까. 엉망으로 실패하고 바닥까지 지쳐도 끝내는 계속해냈던 사람이 등을 밀어주었으니까. 세상을 뜬지 십 년이 지나서도 세상을 놀라게 하는 사람의 조각이 우리 안에 있으니까.

정세랑, 『시선으로부터,』, 문학동네, 2020

※ 건강매거진 데이드 (2022년 2월)에 기고한 글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다시, 오래된 미래로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