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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s bae Nov 25. 2024

아주아주 먼 옛날


그거 알아? 남산도서관이 개관한 지 100년이 넘었대. 1922년 처음 문을 열고 몇 차례 이전과 명칭의 변경을 거쳐 1965년 용산구 후암동, 현재 이곳에 문을 열었어. 총 5층 건물인데 재작년 2층을 대대적으로 리모델링해서 카페 못지않은 내부 인테리어와 야외정원이 한눈에 들어와.



1922년, 나는 갑자기 할머니 생각이 났어. 그렇게 끈끈하지도 애정 어린 눈길로 바라본 적도 없던 할머니가 불현듯 떠오른 건 순전히 그 연도 때문일 거야. 서울에서 막내딸로 태어나 피아노를 배웠다고, 뽀얗고 하얀 얼굴에 손톱칠 하는 걸 좋아하고 레이스 달린 양산을 즐겨 썼던 걸 보면 아마 부잣집 딸내미였나 봐.



꼬꼬지, 할머니도 이곳에 왔을까? 아니, 용산구 후암동이 아니라 중구 소공동에, 일본어를 모국어처럼, 황국신민임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을 때. 할머니는 피아노를 치고 음악을 듣고 무용한 것들을 좋아했잖아.



예민하고 까탈스럽고 자기 몸 치장하길 좋아하는 것이, 피아노를 치는 것이, 꼭 제 할머니 같다니까. 경상도 시골에서 올라온 엄마는 종종 가자미눈을 하고는 비슷한 레퍼토리를 읊었거든.


*


그를 유심히 바라봤어. 검은 안경테, 긴 눈매, 눈 밑에 점, 자연스럽게 손질된 머리카락, 새로 산 운동화, 향수 내음, 음. 멋있네.



느리게 지나가는 구름 좀 보라고 눈짓하는, 나는 그런 남자의 곁에 앉아 나란히 책을 읽고 있어. 할머니는 어땠어? 나는 지나치리만큼 여유롭고 느긋하게 나른한 행복을 맛보는 할머니의 젊은 시절을 상상해.



키가 크고, 피아노를 치고, 졸업식을 더해 갈수록, 내가 마주 본 할머니의 얼굴에는 늘 짙은 어둠이 드리웠고, 종국에는 아빠를 오라버니라 부르며 어린 날로 돌아갔잖아. 그러니 내가 모르는 아주아주 먼 옛날의 할머니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따스한 가을 햇살을 맞으며 환하게 웃고 있었을 것만 같거든.



이상한 일이지? 이제 와 내가 감히 알지 못하는 그 이야기를 마음대로 상상하고, 간절히 듣고 싶어 한다는 게. 그러니 또 누가 알겠어, 언젠가 그 누군가 내 이야기를 간절히 듣고 싶어 하는 날이 올지도.



통창으로 느리게 지나가는 구름이 보여. 아주 가까워 보이는 남산타워도, 붉은 낙엽도, 노란 은행도, 초록 나무도, 푸른 하늘도



가을 햇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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