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이 기다리는 기쁨보다 걱정이 많아졌다
10대의 명절은 언니를 도와 전을 부치고 명절특집 방송과 삼촌들과 이모가 오기를 기다렸다.
어린 나이에 기다렸던 방송을 보는 즐거움은 컸고
친척분들이 오셔서 주시는 용돈의 기쁨은 나를 껑충껑충 뛰게 만들었다.
20대의 명절은 전을 부랴부랴 부치고 밖으로 나가 친구들을 만나기 바빴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에는 하고 싶은 말 한가득을 안고 밥을 먹으면서 그리고 술을 마시면서 하나하나씩 풀다 어느새 밤 12시를 넘기고 새벽 2~3시가 되어도 다
풀지 못하고 헤어지는 아쉬움을 안고 다음 만남을 기약했다.
30대의 명절은 결혼을 하여 나 혼자만의 시간이 아니었다.
서울에서 친정인 광주와 시댁인 무안과 진도를 돌기만 해도 빠듯한 시간으로 친구를 쉽게 볼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결혼을 하고부터 친구보다 가족을 더 생각하게 되었는데 이전까지는 전을 부치고 간단한 일만 도우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엄마가 하는 일을 줄여주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하지만 명절 음식 중 가장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전 부침을 하고 나면 엄마도 나물과 생선찜 및 기타 등등을 끝내 놓은 상태이다. 그럼 나머지 설거지와 뒷정리를 끝내고 시댁으로 향한다.
40대의 명절은 내려가기 전부터 걱정이 앞선다.
점점 몸에 힘이 없다는 엄마의 말. 최대한 일찍 가서 일을 도우고 싶었으나 매번 썼던 휴가를 사용하지 못하였다. 7시간이 걸린다는 귀성길보다 혼자서 일을 하려는 엄마의 모습을 생각하는 것이 더 힘들었다.
드디어 도착하여 문을 연 순간 아빠와 엄마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예전보다 머리와 얼굴살이 빠진 아빠를 보면서 슬픔이 밀려오고 걸어 다닐 때 다리에 힘이 없어 휘청 거릴 거 같은 엄마의 모습에 눈물이 밀려온다.
좋은 날에 서로를 반겨주는 것이 명절이기에 슬픔과 눈물은 잠시 접어두고 일을 하기 시작한다.
어느샌가 고향을 내려갈 때 부모님 상태를 체크하기 시작했다. 살이 빠졌나 더 아픈 곳은 없나. 밥 양은 줄어들지 않았나. 사소 한 것 하나하나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두세 달 만에 한 번씩 보는 부모님 모습에 슬픔을 표현하지 못하고 음식 속에 감춰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
아무렇지 않게 그저 오랜만에 자식들 볼 생각에 기쁜 것인지 조용했던 집안이 사람으로 시끌벌 적한 것이 좋은 것인지 웃으면서 밝은 모습을 보며 간절히 빌어본다.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되었다 40년 넘게 달고 살아온 신경통은 그리 쉽게 나을 수 있는 병이 아니라는 것을.
그러니 욕심부리지 않을 테니 더 아프지 않게 더 달라지지 않게 지금 만큼만 있게 해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