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바로 구절초, 우리가 흔히 들국화라고 부르는 꽃들의 진짜 이름은 구절초야. 쑥부쟁이 종류나 감국이나 산국 같은 꽃들도 사람들은 그냥 구별하지 않고 들국화라고 불러버리는데, 그건 꽃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야. 꽃을 사랑한다면, 당연히 그 이름을 자꾸 불러줘야 해.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냐.
- 「모순」, 양귀자 -
열두 명의 입사 동기들.
직장이 있는 지역이 고향인 사람들이 반, 타지에서 온 사람들이 반이었다. 처음 직장에 들어가 아는 사람이라고는 우리 동기들뿐이므로 한동안은 거의 매일 같이 퇴근 후 뭉쳤다. 저녁 먹고 술 한잔 하며 일터에서의 서로의 안부를, 아니 정확하게는 사무실 분위기와 업무와 상사들에 대해 공유했다. 종일 쭈구리로 보내며 잔뜩 굳어있던 몸과 마음을 우리 안에서 푸는 시간이었다. 외로움을 달래는 시간이었다. ‘동기 사랑 나라 사랑’이라는 말은 다소 오글거리긴 해도 당사자들에게는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니다. 힘든 시간을 함께 나눈 이들은 단순한 직장동료 그 이상이다.
우리 둘은 이 열두 명의 일원이었다. 둘 다 타지에서 왔다. 그리고 동갑이었다.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었고, 연인이 되었다. 스물여섯 친구이자 연인인 우리의 호칭은 스스럼없이 서로의 이름이었다.
4년 연애 후 결혼했다. 왠지 호칭을 바꾸고 싶어졌다. 연인 아닌 부부라면 좀 더 성숙한 느낌이고 싶었다. 사마야, 박사야, 가 익숙하고 애틋하지만, 관계와 상황에 변화가 있으니 호칭도 바꿀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여보. 당신. 음 왠지 입에 붙지 않는다. 뭐랄까, 오래 산 부부 혹은 너무 예의를 갖춘 느낌이다. 우리 부부에게는 와닿지 않으니 패스.
사마씨, 박사씨. 흠. 직장에서 불리는 호칭이다. 몸서리치며 넣어둔다.
신랑~ 그럼 나는? 남편을 그럼 나를 신부~라고 부르나. 남편을 ‘신랑’이라 부르는 중년여성들을 왕왕 본다. ‘신랑’은 갓 결혼했거나 결혼하는 남자, 혹은 신혼 초의 남편을 이르는 말 아니던가. 평생토록 결혼 그 무렵을 생각하며 신랑~이라 하는 것인가 모르겠으나, 뜻을 알고 있는 채로는 그 간극 때문에 영 어색하게 들린다.
자네? 임자? 어디서 들어본 건 다 떠올리다,
자기야. 연인일 때는 절대 안 될 것 같은 간질거리는 호칭이었을 뿐인데, 희한하다. 괜찮은걸.
자기는 ‘나 자신’이라는 뜻인데 배우자를 마주 보며 ‘또 다른 나’라고 부르는 것 같아(또 이렇게 의미 부여하며) 썩 마음에 들었다. 우리는 서로를 똑같이 자기야,라고 부르기로 했다. 입이 착착 붙는다. 자기야, 자기야.
지난달 결혼 12주년이었다. 시간은 냉정하게도 빠르다.
첫째인 딸과 쌍둥이 아들을 낳고 키우며 정신없이 살았다. 남편과 나는 농담 반 섞어 서로를 전우라고 말한다. 믿고 기대고 싸우고 채웠다. 육아하며 일하며, 같은 처지였으니 그리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참 많이도 불러 젖혔다. 특히 내가 그랬다. 자기야 이것 좀 봐줘. 자기야 그거 어때? 자기야 아기가... 자기야, 자기야. 심지어 친정 오빠한테도 말이 헛나와 ‘자기야’, 하고 실소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게 입에 붙어 버렸다.
남편에게 많이 의지했기 때문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원체 호칭을 잘 붙이는 사람이다. 남편 아니라 누구에게라도 말을 걸 때 일단 그 사람을 부르고 시작한다. ㅇㅇ야, ㅇㅇ씨, 팀장님, 엄마, 어쩌고 저쩌고. 언제부터인지 잘 모르겠다. 어릴 때부터였던 것 같기도 하고, 사회생활 하면서 그리되었을 수도 있겠다. 분명한 것은 이것이 습관처럼 배어있기도 함과 동시에, 늘 의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구체적이거나 명확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선천적으로 배려하는 습성을 태어나서 그런지, 사회화되면서 예의를 지키고 상대에 대한 존중을 표현하는 방법의 하나라고 익힌 것 같기도 하다.
남편이 호칭을 생략하고 말하는 것을 최근에 알아챘다. 그리 눈치 빠른 편은 못되어 그런지, 그간은 그의 말에 별생각 없이 응하곤 했다. 그런데 무슨 말인가 하는 것 같은데, 두세 번 말은 하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누구도 반응하지 않는다. 그제야 “자기야.” 부른다. 나한테 하는 말이었어? 헛웃음이 나왔다. 아이, 참. “불러야 알지~”
어쩌면 꽤 오래됐을지도 모르겠다. 내 입에 배다시피 한 ‘자기야’를 남편은 아예 괄호 처리한 게. 한 번 인지하고 나니 자꾸만 거슬리는 거다. 단둘이 있는 것도, 가까이 있는 것도 아닌 상황에서 상대를 부르지 않고 본론부터 말하는 것이 말이다. 조선시대 아부지세요?
가끔은 “응? 누구?” “누구한테 하시는 말인지?”라고 받아치며 참교육 한번 하고 웃고 넘긴다. 남편의 불순한 의도나 성의 없음을 뜻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서로 불쾌함을 남기지는 않는다.
하지만, 아무리 그 존재가 항상 그 자리에 있고, 내 ‘자기’라는 게 분명할지언정, 당연한 것은 아니다. 부르지 않거나 아무렇게나 부르면 그것은 그것이 아니게 된다. ‘자기’라고 함부로 하거나 생략해서는 안 된다. ‘자기’일수록, '자기'니까 예의를 갖추었으면 한다.
“꽃을 사랑한다면, 당연히 그 이름을 자꾸 불러줘야 해.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