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과 여성9
중학교를 졸업하고 기숙사형 고등학교로 진학하고는 줄곧 이사 인생이었다. 기숙사, 하숙, 홈쉐어, 고시텔, 원룸, 옥탑방, 오피스텔, 아파트, 전원주택. 기억을 더듬거리며 나열해 보니 우리나라 주거형태 중에 살아보지 않는 주거 공간이 없다. 아, 반지하 살이만 없었다는 건 다행인 걸까?
이사가 잦았던 만큼 물건 소유는 부담이었다. 처음 기숙사를 들어갈 때 챙겼던 가방 하나로 시작해서 신혼 짐을 1톤 트럭에 싣고 시골로 이사를 왔다. 그리고 올해 초에는 1톤 트럭 두 대를 끌고 월셋집으로 이사했다. 식구가 늘어난 만큼 짐도 늘었지만 가방 하나로 시작했던 처음과 지금의 내가 가진 것들을 살펴보게 된다. 무슨 물건들이 새로 생겼고 내가 오랫동안 가지고 있는 물건은 무엇인가. 집 안 구석을 더듬으며 생각해 본다. 손님맞이용 침구와 그릇, 수저도 갯수가 늘고, 처분을 해도 다시 늘어나는 서적들과 아이 옷과 장난감, 체중 변화로 입지 못하지만 옷장 한 칸을 차지하는 남편의 양복과 브랜드 옷 등등. 삶의 형태가 바뀌었듯 나를 감싸는 물건들도 나가고, 새로 들어왔다.
나는 물건을 잘 버리는 편이다. 집 안에 자리를 찾지 못하고 굴러다니는 물건은 미련 없이 버린다. 물건이 많으면 청소와 정리가 오래 걸리고 집에서도 편히 쉬지 못하는 기분이 든다. 이러한 나의 습성은 이사가 잦고 소박한 공간을 좋아하는 취향이 반영되었다. 이제는 어딘가에 뿌리를 내릴 때인가 보다. 좋은 물건을 사서 윤이 나도록 쓰고 오랫동안 텃밭 정원을 가꾸며 아이를 학교 보내고 음식을 만들고 싶다는 소망이 생긴다.
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물건을 떠올리니 ‘행주’이다. 출산 준비로 광목천 몇 마를 구매해 아이 기저귀를 만들었다. 출산 후 천 기저귀를 사용하겠다는 야심은 금세 꺾기고 아이 옷장 깊숙이 넣어놓았다. 시간이 될 때마다 천 기저귀를 꺼내 알맞은 크기로 자르고 박음질하고 자수를 놓았다. 그렇게 주방 수납장에 하얗고 부드러운 광목 행주가 한 개, 두 개씩 늘었다. 주방에서 광목 행주 쓰임새는 다양하다. 젖은 그릇과 칼, 과일 등을 닦고 더러운 식탁과 조리대를 정리한다. 그릇 건조대가 부족할 때에는 깨끗한 행주 한 장을 펼쳐 그 위에 그릇과 냄비, 컵 등을 올려 말린다. 저녁에는 사용한 행주는 몽땅 냄비에 담아 과탄산소다를 넣고 푹푹 삶아 다음날 햇볕에 널어놓는다. 이렇게 매일 빨고 말리고를 반복하니 몇몇 행주는 군데군데 찢어져 허름하다. 쓰고 버리는 물티슈보다 번거롭지만 매일 삶아 햇볕에 말린 행주를 사용하는 기분은 늘 경쾌하다. 사용한 사람만 누릴 수 있는 호사로운 기분. 때문에 우리 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물건은 서툰 솜씨로 자수를 놓아 만든 광목 행주이다.
사람이 사용하는 물건을 보면 취향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요즘처럼 물건을 버리기 쉽고, 사기도 쉬운 시대에 물건으로 사람을 판단할 수 있다니... 아찔한 문장이다. 이럴 때일수록 물건을 사기 전에 한 번 더 돌아보겠다는 상투적인 말은 하지 않겠다. 그래! 나는 이런 물건을 쓰고 모으고 애정 하는 사람이다! 이런 나를 마음껏 알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