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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 May 10. 2019

14. 아무것도 안바른 식빵의 속살이 좋아서.

심심한 유럽식 맨 빵 혹은 식빵 예찬 (진정한 탄수화물 중독)


어렸을 적 제일 좋아하던 빵은 

여느 동네 빵집가도 다 있을만한 '바나나빵' 이었다. 실제로 바나나가 든 것은 아니지만 카스테라 맛이 나는 그 노오란 바나나 모양의 빵 2개가 나란히 포장되어 있는 그 모습은, 어머니랑 빵집에 갈 때마다 나를 유혹했고 나는 항상 그 바나나빵과 피자빵을 골랐다. 피자빵을 싫어하는 어린 아이가 있을까? 그 당시 피자빵은 진짜 피자보다 더 맛있었다. 피자빵을 맨날 먹다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피자를 먹었을 때 그 실망감이란. 아니 이게 피자란 거야? 맛이 너무 없는데. 피자빵이 훨씬 맛있어!!! 했던 게 아직도 생각난다.

비록 어머니는 몸에 안좋다고 피자빵 보다는 바나나빵이나 단팥빵을 주로 사주었지만.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 바나나빵이나 단팥빵이라고 그리 몸에 좋은 건 아닌 거 같다. 어차피 설탕 범벅 아닌가. 특히 바나나빵은 지금 맛을 상상만 해도 참 달다. 식사보다는 간식에 가까운 달달한 일본식 빵을 좋아하던 내가 심심한 맨 빵에 집착하기 시작한 것은 우리 어머니가 홈쇼핑에서 '빵 만드는 기계'를 샀을 무렵 부터가 아닌가 싶다. 

당시 홈쇼핑은 핫했고, 우리 어머니도 "아무리 무거운 것도 잘 붙인다는 '믹스앤픽스'" "날씬한 몸매를 원하십니까, 파워 슬라이드" 등 남자 성우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멤도는 홈쇼핑 광고에 자주 홀렸다. 그리고 집에서 빵을 만들 수 있는 기계를 기꺼이 구매하셨는데 이게 오븐 같은 것도 아니고 무슨 밀가루 같은 걸 넣고 뭘 하면 그걸 통식빵 처럼 만드는 그런 거였다. 어머니는 매일 같은 빵...을 만들었고 동생과 나는 그 빵을 매일 같이 처리해야했다. 

생각해보면 그 때의 나는 빵순이는 아니었다. 빵보다는 밥! 주의였는데 유독 맨밥을 참 좋아했다. 너무 질지도, 너무 덜되지도 않은 그 고슬고슬한 쌀밥 그 자체가 너무 좋았다. 그래서 반찬 없이도 그 흰밥을 잘 먹었다. 그러다가 간장 참기름밥에 한때 꽂혀서 한동안 그것만 먹었고 그게 나중엔 고추장 참기름밥 (고추장 한스푼 + 참기름 쪼금)에 푹 빠져가지고 한 3개월동안 매일 간식처럼 먹었다. (점심은 학교에서 먹고 저녁에 이렇게 먹으면 아버지에게 혼났으므로 나는 항상 학교에서 마치고 저녁 먹기 전에 밥솥에 남은 밥에 고추장을 비벼 먹었다.) 잘 지어진 밥을 꼭꼭 오랫동안 씹어먹으면 나오는 그 특유의 구수함이 좋았다. 이거야말로 탄수화물 중독인건가. 이 증상이 어머니의 제빵 기계로 인해 맨 빵으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식빵 먹을 때 잼 바르는 걸 별로 안좋아한다. 어렸을 때야, 버터에 입문하기 전이었으니 잼밖에 없었기 때문에 식빵을 어쩌다 먹게 되면 어머니가 항상 잼을 발라 주셨다. 그러면 그건 또 그거대로 먹고 또 몰래 식빵 봉지를 풀어서 맨 식빵을 꺼내 먹는거다. 맨 식빵에 테두리를 먼저 발라내고 그 속의 하얀 속살을 천천히 먹으면 그 나름의 쫄깃함과 부드러움이 정말 맛있었다. 


이처럼 그 심심한 맛을 좋아하기 때문에 나는 피자를 먹을 때 맨 마지막 테두리를 안먹는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치즈 크러스트 말고, 그냥 그 아무것도 없는 테두리. 같이 피자 먹는 사람이 그 마지막 테두리 부분만 안먹는 모습을 보면 괜히 뭔가 아깝다. 힝. 저기가 제일 맛있는 부분인데. 

언젠가 '가난한 세계 배낭여행'을 각각 6개월했을 때 돈을 최대한 아끼기 위해 식빵 같은 식사빵 (호밀빵, 통밀빵 등 포함)을 한 봉지 사서 하루 종일 삼시세끼를 해결한 적도 있었다. 아니, 꽤 많은 날을 그렇게 보냈다. 당시에는 내 여행에서 '맛집'이란 테마는 거의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믿을 수 없다. 당시 6개월을 유럽에서 보내면서 맛집, 레스토랑을 간 것은 60일도 채 되지 않는다. 대부분 샌드위치를 열심히 해먹거나 그냥 맨 빵을 먹었다) 


누군가는 이를 눈물젖은 빵이라곤 하는데 난 희한하게 그 맨 빵이 너무 맛있는 거다. 특히 유럽은 각종 천연빵, 발효빵이 발달되어 있지 않나. 나는 바게트, 통밀빵, 호밀빵, 포카치아, 치아바타, 프레즐, 난 (인도 짜파티 등)  등 단독으로 먹으면 심심하다고 불릴만한 빵들을 아무것도 첨가하지 않고 그 빵 그대로 즐기는 것이 너무 좋았다. 

러시아에 첫 입성했을 때 그 곳에선 너무나 흔한 검은 흑빵의 맛이 너무 궁금했다. 당시 2010년 초반에는 이렇게 새까만 흑빵은 흔치 않았고 맛이 상상이 가지 않아서 호기심으로 구매해서 먹은 흑빵의 첫 인상은 그리 좋지 않았다. 우웩, 이게 뭐지. 딱딱하고 시큼하고 아무 맛도 안나. 


근데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흑빵의 오묘한 맛에 매력을 느끼고, 100% 호밀빵의 그 특유의 시큼함에 중독된 것이다. 지금도 그 때 러시아 여행하면서 꽤 맘껏 먹었던 흑빵이 그리운데 한국 어디에서 그걸 먹을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 흑빵도 사실 잼이나 이런 걸 발라먹지 않으면 그냥 딱딱하고 '무맛'에 가까운 빵인데 그 맨빵을 오랫동안 씹으면 나는 그 구수함이 좋았다. 

심지어 인도 여행할 때 난과 조금 다른 '짜파티' 도 다른 커리나 요리와 같이 먹지 않고 그 짜파티만 뜯어 먹기도 했었다. 

*짜파티 : 난과 비슷한데 짜파티는 기름을 거의 쓰지 않고 납작하게 굽는 밀가루빵이다. 보통 커리 등 각종 요리와 곁들여 먹는 주식이다

이처럼 나는 맨 빵에 조금, 아니 많이 집착한다. 식빵에 잼을 바르는 것을 싫어하고 만약 뭔가를 굳이 얹어야 한다면 토스트한 식빵에 버터를 올려 녹이는정도. 단 맛보다는 차라리 짭짤한 맛 (Savory) 이 좋다. 그런 의미에서 샌드위치도 꽤 좋아하는 편이다. 이것저것 마요네즈에 재료를 버무린 그런 샌드위치 말고 재료 그 자체를 넣고 드레싱 소스를 최소화한 그런 샌드위치. 서브웨이에서 주문할 때 항상 엄청 매운 핫소스(너무 매워서 핫핫 거리며 먹는다) 아니면 레드와인식초, 올리브오일 정도만 넣는다. 올리브오일 말이 나와서 그런데 나는 올리브오일도 조금 병적으로 좋아한다. 식빵과 올리브오일만 있으면 나는 그 식빵 한 줄을 그 자리에서 다 먹을 수도 있다. (생각해보니 올리브오일이 없어도 그 식빵 한 줄을 다 먹을 수 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맛있는 맨 빵을 먹으려면 결국 비건 베이커리나 호밀빵, 통밀빵을 제대로 다루는 빵집에 가야한다. 그런데 이러한 빵집들은 대부분 작게 운영을 하고 그 날 만든 빵을 그날 소진하는 경우가 많아서, 호밀 비중이 높은 호밀 100%빵은 취급도 안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통밀 함량이 높은 통밀빵도 늦게 가면 다 팔리고 없는 경우가 많다. (호밀 100%빵을 파는 곳은 정말 드물다. 있다 하더라도, 가격이 정말 비싸다) 그나마 내가 사는 곳에는 이러한 빵들을 파는 빵집이 많은데, 주말을 제외하곤 빵을 사러갈 시간대가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최근 마켓컬리를 시작했는데. 호밀빵/통밀빵으로 유명한 빵집의 빵 배달도 하기 때문이다. (이 역시 밤 11시 직전이 되면 미친듯이 품절되기 시작한다) 


대학생 때는 비싸서 먹고 싶어도 잘 안사먹었는데 최근들어 미친듯이 이같은 유럽식 맨 빵이 땡기기 시작한다. 오죽하면 오늘, 더브레드 블루의 양이 꽤 되는 통밀빵을 앉은 자리에서 다 해치워버렸다. 그리고 그에 대한 죄책감으로 오늘 운동을 좀 빡세게 하고 와서 또다시 맨 빵의 예찬글을 쓰고 있는 거다. 

그와중에 내일 아침, 냉동실에 얼려놓은 세이글 호밀빵 먹을 생각에 벌써 설레는 나를 보면 

거 참. 파블로프의 개가 된 거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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